[박동희 칼럼]- [매거진S] 김연아의 ‘인형의 집’

12월 14일 막을 내린 2008 SBS·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Grand prix)파이널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랑프리대회이자 국내피겨스케이팅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대회였다. 여자 싱글의 김연아(18,군포수리고)와 아사다 마오(일본), 남자싱글의 브라이언 쥬베르(프랑스)와 조니 위어(미국) 등 세계 톱랭커들이 총출동한 그랑프리 파이널은 김연아가 대회 3년 연속 메달 획득에 성공하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스포츠춘추>가 대회 기간 동안 수준 높은 경기력과 풍성한 화제 이면에 존재한, 다양한 그림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김연아는 햇빛 속을 떠도는 먼지처럼 불규칙했던 피겨팬들이 보다 넓은 피겨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준 이였다. 어쩌면 ‘피겨팬’에게 김연아는 웬디 일행을 네버랜드로 안내한 ‘피터팬’인지 모른다(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4분만….’ 12월 13일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의 마지막 선수, 김연아가 등장했을 때 입김처럼 새어 나온 말은 그랬다. 김연아도 알고 있었을까.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알려는 듯 전광판으로 눈을 돌리는 게 보였다.


시작은 좋았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발레곡 ‘세헤라자데’가 푸른빛의 빙상장에 흐르는 가운데 자줏빛 의상의 김연아는 우아하지만 빠른 몸놀림으로 은반 위를 질주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리플(3회전)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가 중요하다. 성공만 하면 절반은 끝낸 셈이다.” 경기 전 만났던 한 유럽 기자는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반드시 처음 시도하는 3-3 점프를 성공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성공이었다. 그것도 완벽한. 이날 출전한 6명의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3-3 점프였다.


‘3분 33초….’ 마음이 바빠진다. 시간이 빨리 지나야 할 텐데. 잠시 뒤. 김연아가 트리플루프와 트리플러츠-더블(2회전)토룹-더블루프 3연속 점프 콤비네이션을 시도했다. “3연속 점프 콤비네이션을 성공한다면 더 좋은 흐름을 탈 수 있다. 일종의 결정타라고나 할까.” 다시 유럽 기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성공이었다. 김연아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풍선처럼 몸이 가벼워 보였다. 지금처럼만 컨디션을 유지한다면 그랑프리 파이널 3년 연속 우승은 일도 아니었다. 누가 세계 여자피겨계의 진정한 여왕인가에 대한 논란도 명쾌하게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김연아는 플라잉 싯스핀에 이어 전날 쇼트프로그램에서 실수한 더블악셀-트리플토루프 점프마저 완벽하게 해냈다. 시계를 본다. 2분이 지났다.


‘1분 41초….’ 그때였다. 김연아가 트리플러츠를 시도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대회장을 둘러싼 모험


12월 10일 막을 올린 2008 SBS·ISU(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그랑프리대회이자 국내피겨스케이팅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대회였다. 대회를 치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대회장 선정이었다.


대회 유치서부터 진행까지 깊숙이 관련한 한 빙상인과 모 빙상 관계자는 <스포츠춘추>에 경기도 고양 어울림누리 빙상장이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장으로 선택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연은 이렇다.


그랑프리 파이널 개최지로 한국이 선정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SBS였다. SBS는 ISU의 주요 중계권 계약사로서의 유리한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 한국에서 그랑프리 파이널이 열리도록 직·간접적인 노력을 했다. 대회장은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처음부터 의중에 뒀던 경기도 고양 킨텍스(한국국제전시장)가 유력했다. 이들은 “연맹이 킨텍스를 고집한 건 순전히 ‘넓은 경기장에서 대회를 치러 달라’는 팬들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때 연맹을 도운 곳이 있다. 김연아의 소속사 IB스포츠다. IB스포츠는 자비를 들이면서까지 킨텍스를 대회장으로 하기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실제로 연맹과 IB스포츠는 구체적인 예산까지 짜며 킨텍스 유치를 확정지으려 했다. 그러나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모 빙상인의 말을 들어보자. “경기도 도의원이자 고양시빙상경기연맹 관계자인 모 씨가 경기도와 고양시로부터 예산을 끌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이가 IB스포츠를 무척 싫어했다. 지난 2월 고양에서 열린 4대륙선수권대회 때 김연아의 불참이 IB스포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IB스포츠는 절대 개입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때부터 킨텍스 개최는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고양 어울림누리 빙상장. 피겨팬들의 억눌렸던 열정과 기쁨을 담기엔 너무 협소한 곳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곳은 훗날 한국 피겨의 역사가 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연맹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연맹은 킨텍스 개최가 물 건너간 뒤 서울 목동 실내빙상장을 대회장으로 하겠다고 ISU측에 알렸다. 팬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연맹의 주장이다. 그러나 ISU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고양 어울림누리 빙상장을 최종 선택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대개 개최국 연맹에서 정하는 곳을 대회장으로 삼기 때문이다. 자, 여기까지가 알려진 이야기다. 반대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 빙상인이 “경기도 도의원이자 고양시빙상연맹 관계자”라고 밝힌 이는 진종설 경기도의회 의장 겸 고양시빙상경기연맹회장이다. 한때 네티즌 사이에서 ‘공적’이 됐던 인물이다. 진 의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진 의장은 4대륙선수권대회 때 자신과 ISU가 IB스포츠를 오해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선수가 아프면 나오지 않는 게 맞다. 그런데 갑자기 IB스포츠에서 ‘김연아가 나온다, 안 나온다’ 말 바꾸기를 하다가 결국 갈라쇼에만 나오겠다는 소릴 했다. ISU가 ‘경쟁부문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가 어째서 갈라쇼에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진 의장은 킨텍스건에 대해서도 사실과 너무 다르게 알려졌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킨텍스는 연맹보다 먼저 고양시가 대회장으로 쓰길 바랐던 곳이다. 오타비오 친콴타(이탈리아) 회장을 비롯해 ISU 집행위원들이 4대륙선수권대회 관전 차 왔을 때 일부러 킨텍스를 데려갔다. 당시 대부분의 ISU 관계자들이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친콴타 회장이 한 마디를 물은 다음부턴 킨텍스는 물 건너갔다. 무슨 말이었느냐고? 천장이 얼마나 높으냐고 물었다.”


당시 고양시 관계자는 스스럼없이 “15m”라고 대답했다. 친콴타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No”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ISU 관계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ISU 내부규정은 대회장 천장은 30m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관중들이 불편 없이 관전할 수 있고 정상적인 조명설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장이 낮을 경우 조명 때문에 빙판이 금세 녹을 수 있다고 한다.


추가공사비 10억 원을 들이면 천장은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사비도 공사비지만 킨텍스의 영업을 마냥 방해할 순 없었다. SBS의 한 PD도 “킨텍스가 유력했지만 천장 때문에 무산됐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빙상인은 연맹이 팬들을 생각해 서울 목동 실내빙상장을 대회장으로 쓰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경기도와 고양시로부터 5억 원씩 총 10억 원을 지원받기로 한 연맹이 대회장을 서울로 옮긴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목동에서 하겠다는 사람들이 대관신청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기다 ISU 실사단이 방한했을 때 목동 실내빙상장은 일전 아이쇼를 앞두고 지붕에 불이 났던 게 마이너스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스포츠춘추>는 연맹이 킨텍스에 설치하기 위해 만든 좌석 설치도를 비롯해 각종 도면을 입수했다. 






연맹이 설계했던 킨텍스 좌석 배치도(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도면에 따르면 의자폭은 27cm에 불과한데다 등판이도 없다. 구조도 합판이다. 당시 연맹 측의 설명회에 참가한 모 인사는 “관중석 각도 역시 무척 낮아 앞사람 뒤통수 때문에 경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며 “ISU가 애초에 제시한 의자폭 45cm 이상, 등받이 필수, 안전도 소방검사 통과, 천장 15m 이상에 어느 하나도 부합되는 게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연맹이 이 같은 좌석으로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연맹 관계자의 말대로 더 많은 이들이 피겨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실제로 연맹이 제시한 도면으로 공사하면 1만5천 석도 거뜬하다는 게 건축업계의 설명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수익 때문이었을 거다. 연맹이 대회장을 두고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결국 서울 대신 고양으로 간 건 10억 원 때문이었다. 킨텍스라면 막대한 관중 수입과 큰 대회장인 만큼 여기저기 광고가 들어갈 자리가 많아 부대이익을 챙기기 쉬웠을 것이다. 연맹과 IB스포츠가 ‘적자도 감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물밑에서 대기업 스폰서를 물색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 빙상인의 증언이다.


연맹은 ISU가 거부 의사를 밝힌 뒤에도 지속적으로 킨텍스를 대회장으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10월 초 ISU 실사단이 방한했을 때 이미 대회장 후보에서 제외됐던 킨텍스를 재차 강조했다. 얼마나 연맹의 권유가 집요했으면 실사단 사이에서 “한국 연맹이 정작 바라는 게 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다. 그랑프리 파이널 기간 중 ISU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도 연맹과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란 소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연맹을 향한 ISU의 오해가 자칫 김연아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데 있다. ISU는 상근직원이 8명 남짓한 미니국제연맹이다. 말도 많고 소문도 금방 퍼진다. 연맹에 대한 불신이 연맹의 공식대행사인 IB스포츠에 대한 억측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소속선수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단 뜻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사다 마오의 소속사 IMG는 더 하지 않나.” 취재 중 한 빙상인은 기자에게 그렇게 반문했다. 맞는 말이었다. IMG는 세계적 스포츠매니지먼트사이자 ISU의 공식대행사다. 한국 IMG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IMG 힘이 막강하다지만 그들이 ISU와 논의해 대회장을 결정하거나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IMG가 ‘공식’이란 직함을 단 대행사라도 말이다.


아사다를 관리하는 일본 IMG는 되레 아사다가 불필요한 오해로 작은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전전긍긍한다. 대회 기간 중에는 철저하게 선수의 경기력 향상에만 집중한다. 대신 소리 없는 작전을 펼친다. 타티아나 타라소바 코치 영입이 그것이다. 세계 피겨계에서 ‘타라소바의 선수’라는 건 엄청난 프리미엄이다. 심판부터 채점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맹은 처음부터 ISU의 속성을 알았어야 했다. ISU의 대회장 선정기준은 처음부터 관중수보다 안전이었고, 규모보단 내실이었다. 당초 ISU가 고양 어울림누리 빙상장에 4천석 이상의 좌석을 요구했지만 가변좌석을 통틀어 3천600석밖에 증설이 되지 않았음에도 입을 다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ISU가 웬일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ISU는 이번 대회의 티켓권리를 연맹에게 모두 넘긴 상태였다. SBS와 중계권 협상을 하며 연맹이 자기 몫을 주장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상차원이었다. 그러니까 ISU에게 입장수익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연맹이 좀 더 일찍 대회장을 고민하고 ISU의 속성을 파악했다면 일생에 한 번 뿐일 은반의 기적을 보다 많은 피겨팬들이 직접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관중이 들고 있는 손 배너는 한 피겨사이트 동호인들이 자비를 들여 제작한 것이다. 김연아를 응원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추운 빙상장에서 모포 역할을 대신하라는 뜻도 있었다. 일부 스포츠 근본주의자들에겐 흉기로 비칠 수도 있었으리라(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선택과 집중’이 빛났던 작전. 그러나.


“앗!” 외마디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김연아의 트리플러츠(6.6점)가 1회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불길한 징조였다. 김연아는 전날 쇼트프로그램에서도 트리플 러츠를 싱글 처리했다. ‘명품 러츠’로 불렸던 그의 트리플러츠가 중요한 순간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부에선 김연아가 트리플루프(기본점수 5.0)를 더블악셀(기본점수 3.5)로 대체한 것을 두고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작전일 수 있었다.


김연아는 트리플러츠 실수를 잊은 듯 스파이럴 시퀀스에서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차례로 스텝과 스핀 연기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순간의 실수를 만회해 나갔다.


“김연아는 아사다보다 스피드와 음악을 컨트롤 할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 얼굴 표정만 봐도 그렇다. 아사다가 미소와 무표정 2가지라면 김연아는 애절함, 분노, 유머, 패기와 같이 섬세한 표정을 연출한다. 김연아가 점프 실수로 쇼트프로그램 기술 점수에서 아사다에게 0.2점 뒤졌음에도 프로그램 구성점수에서 0.76점을 앞선 건 예술적 표현력에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캐나다 CBC 관계자의 말처럼 프리스케이팅에서도 더 이상의 실수를 줄인다면 예술성이 높은 김연아의 승리가 확실했다. 김연아가 승리에 쇄기를 박으려는 듯 서서히 트리플살코를 준비했다. 기본점수 4.50점의 트리플살코를 ‘피겨여왕’이 실패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요술 쇼핑백과 과묵한 VIP들


12일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피겨여왕’ 김연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이들로 관중석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프로야구에서나 볼 수 있던 ‘만원 관중’이 피겨 경기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랑프리 파이널의 열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김연아가 국내 팬들 앞에서 경기를 펼치는 데다 세계 최고의 피겨스타들이 총출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티켓 판매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인터넷을 통해 1, 2차로 티켓을 판매했을 때 2번 모두 예매 15, 40분 만에 매진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연맹 관계자의 말이다.







김연아의 표정은 피겨스케이터 이상이다. 그야말로 피겨를 기계체조에서 기예로 승격시킨 이다(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일부 언론에서 ‘과열’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그랑프리 파이널에 쏠리는 관심은 대단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과열’과는 거리가 멀었다. 1, 2차 판매분이 고작 1천749장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겨마니아가 아니라도 국내에서 열리는 김연아 출전 첫 국제대회라, 많은 이들이 관전을 희망한 걸 상기하면 턱없이 부족한 공급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나머지 표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울림누리 빙상장의 수용인원이 가변좌석 포함 3천650석이었으니 1천901장이 남은 셈이었다. 항간에는 개최자금 5억 원씩 후원한 경기도와 고양시가 각각 205장씩, ISU 공식대행사 IMG와 대회 주관방송사 SBS, 언론용으로 각각 100장씩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다 선수 가족과 선수 그리고 ISU 관계자 몫으로 200장이 배정됐다고 한다.


이날 빙상장에 상주한 고양시 공무원들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나 남자 싱글이 시작할 즈음 갑자기 밀려든 초청 인사들을 영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시 공무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쇼핑백에서 목걸이용 패찰 수십 개를 꺼내고 있었다. 이들은 몇 시간 전에도 똑같은 쇼핑백에서 목걸이용 패찰을 꺼내 일단의 사람들에게 전달한 바 있었다.


“몽골 외교관용 데일리 패스다.” 쇼핑백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시 관계자가 당당하게 들려준 대답이다. 몽골 외교관이라, 그렇다면 몽골 외교관이 얼마나 왔는지 물었다.


“18명쯤 왔나.” 첫 대답에 비해 영 힘이 없었다. 취재 결과 아니나 다를까 목걸이용 패찰은 몽골 외교관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양시 관계자는 “실은 VIP용 패스”라며 “ISU 규정상 VIP라도 목에 차게 돼 있지만 현실적으로 VIP들에게 목에 차라고 강요할 수 없어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게 VIP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물었다. “장, 차관이나 국회의원 등이 아니겠느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VIP석을 경호하던 보안업체 직원은 “시의원이나 지역유지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양시 공무원들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발언에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장의 패스도 만들 것 같은 요술 쇼핑백을 보면서, 영하의 날씨에  ‘혹시나 1장이라도 살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매표소를 서성하는 이들이 눈에 밟혔다.

나머지 초청장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 IMG몫으로 돌아간 100장은 스폰서 접대용이었다. SBS 역시 중계진과 취재진을 모두 합쳐 100장이 지급된지라 오히려 티켓이 부족했다는 후문이다.


의문은 아직 남아있다. 지금까지 나열된 초청권을 모두 합쳐도 1천장 남짓이다. 초청권 900장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 초청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암표상이다. 암표상들은 빙상장 주변을 배회하며 5만 원짜리 R석을 50만 원까지 올려 부르는 등 흥정에 열심이었다. 암표상들의 손에 쥐어 있던 수많은 초청권들 어디서 왔는지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청권의 폐해는 암표를 양산함과 동시에 경기를 정말 보고자 했던 이들의 관전 기회를 박탈했다는데 있다. 12, 13일 코미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벌어졌다. 브라이언 쥬베르(프랑스), 고즈카 다카히코(일본), 조니 위어(미국) 등 세계 최고의 남자 스케이터들이 출전한 남자 싱글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다. 관중석 여기저기에 빈 자리가 보인 것도 이상했지만 링크 주변 VIP석이 휑하니 비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여자 싱글 경기가 끝난 뒤 링크 주변에 마련된 VIP석은 파도가 휩쓸고 간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암표로 치면 100만 원이 호가해야할 곳은 대회기간 내내 빈 자리가 눈에 띄게 많았다.(사진=스포츠춘추 최은이)


대회 기간 동안 대회주최 측은 빙상장 상단 중앙과 링크 주변에 간이 스탠드를 설치해 2곳의 VIP석을 마련했다. 주로 정치인과 고위직 공무원, ISU 관계자들은 빙상장 상단 중앙에 마련된 VIP석에서,  따로 초청권이 발부된 이들은 링크 주변 VIP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5만 원 짜리 R석이 50만 원짜리 암표로 둔갑한 점을 감안할 때 VIP석은 암표로 치면 100만 원이 넘고도 남을 일이었다. 선수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링크 주변 VIP석은 그래서 피겨팬들 사이에선 ‘꿈의 좌석’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 좌석이 텅텅 비어 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VIP석에 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초청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출처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피겨에 썩 관심이 많은 이들이 아니란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오직 김연아의 경기장면만 보길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남자 싱글이 끝날 때까지 텅 비어있던 VIP석이 김연아가 출전하는 여자 싱글이 시작하자 어느 새 만석을 이뤘고 여자 싱글이 끝나고 페어가 시작하자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빙상장 상단의 가장 후미진 B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던 임경화(27) 씨는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가 아니라 그랑프리 파이널 초청대회로 대회명을 바꿔야할 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2번의 실수. 다시 시작


프리스케이팅 시작 전 국내외 피겨전문가들은 김연아의 최대 경계대상으로 아사다가 아닌 체력을 꼽았다.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중반까지 김연아는 항상 완벽한 연기로 경쟁 선수들의 넋을 빼놓았다. 그러나 프리스케이팅 종반이 문제였다. 태엽이 다 풀린 인형처럼 갑자기 기세가 꺾이곤 했던 것이다.


“어머!” 불길한 예상은 좀체 어둠으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관중석에서 또 한 번 탄식과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연아가 트리플살코 점프 뒤 착빙에 실패하며 엉덩방아를 찐 것이다.


아사다가 2번의 트리플액셀에 성공한 걸 떠올릴 때 트리플러츠에 이은 트리플살코의 실수는 뼈아팠다. 예술적 표현력에서 아사다와 차이가 크다손 쳐도 이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써 케첩 뚜껑을 헐겁게 해놨더니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따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풀밭에 넘어지기라도 했다는 듯 ‘툭’ 털고 일어나 다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마지막 더블액셀을 성공한 김연아는 컴비네이션 스핀에 이어 특유의 강렬한 눈빛으로 심판들을 응시했다.






‘3년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메달 획득에 성공’한 김연아(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피겨팬과 피터팬


“언제부터 한국에 피겨팬이 있었나. 그들은 피겨팬이 아니라 김연아팬들이다.”일부의 목소리다. 그들의 말대로 한국에서 피겨팬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멸종’된 지 오래인 세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1924년 창경원(현 창경궁)의 작은 연못에서 8명의 멤버로 ‘피규어스케잇구락부’가 결성된 뒤부터 한국에서 피겨는 존재했고 피겨 동호인과 팬 역시 실재했다.


1985년 3월 서울과 대구에서 공연한 ‘세계남녀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입상 우수선수 초청 시범경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초청경기에서 트리플 점프와 화려한 스핀으로 관중들의 혼을 빼앗았던 카타리나 비트를 기억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당시 서울 동대문 실내빙상장의 입장권은 2만 원이었다. 그러나 8~10만 원에 암표가 거래되는 기현상이 일어났고 피겨는 국가대표 축구에서도 좀체 보기 힘들었던 만원사례를 이뤘다.
그렇다. 한국에 피겨팬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한국의 피겨팬들은 스포츠뉴스 말미의 ‘해외토픽’를 통해서나 피겨를 만나야 하는, 이따금 국내에서 개최하는 아이스쇼에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 비인기스포츠의 팬이었을 뿐이다.


김연아는 햇빛 속을 떠도는 먼지처럼 불규칙했던 피겨팬들이 보다 넓은 피겨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준 이였다. 어쩌면 ‘피겨팬’에게 김연아는 웬디 일행을 네버랜드로 안내한 ‘피터팬’인지 모른다.


피겨팬들이 그들의 피터팬을 맞는 방식을 가리켜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다. 과도한 응원과 함성이 되레 피터팬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염려하는 것도 존중받아야할 목소리다. 그러나 관중문화와 관련돼 혀를 차는 이들 가운데 이날 현장에 있던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12일 열린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토마스 베르너(체코)가 빙판 위에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점프부터 일이 꼬였다.


베르너가 쿼드러플(4회전) 토룹 점프를 시도할 때 난데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것이다. 점프 직전, 불과 1m 앞에서 터진 플래시라 빛의 세기는 매우 강했다. 그 탓일까. 베르너가 착빙에 실패하며 중심을 잃고 그만 빙판에 쓰러졌다. 기본점수 9.8의 쿼드러플 토룹이 -4.8점이나 감점되며 5.00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베르너가 몸을 일으켜 경기에 집중했지만 카메라 플래시는 한 차례 더 그의 얼굴을 향해 터졌다. 그것도 동일인이.


베르너는 경기가 끝난 뒤 ‘키스 앤 크라이존’에서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연신 미소를 보였다. 관중의 카메라 플래시도 경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대범한 자세였다. 그러나 베르너의 대범함을 지켜보는 관중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베르너의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 터트리지 마세요”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잔디밭과 빙판을 구별하지 못했던 카메라 플래시의 주인공은 잠시 뒤 자리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날 ‘플래시맨’은 그만이 아니었다.


경기 전 약속이라도 했는지 잊을 만하면 도처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불을 뿜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을 제지했던 건 “카메라 플래시 터트리지 마라”라는 피겨팬들의 목소리였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고함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날 경기를 보기 위해 관중들은 2~5만 원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입장료가 싼 영화관도 이미 오래 전부터 영화 상영 중 지켜야할 에티켓을 안내영상으로 내보내고 있다. 경기 전이나 정빙 때 장내 방송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지 말라”고 공지를 했으면 될 일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대회본부 측은 뭘 하고 있던 것일까.


주니어 경기가 시작된 11일부터 시니어 경기를 모두 마친 13일까지 선수들의 경기력을 방해할 만한 그 어떤 응원과 방해도 없었다. 함성은 경기의 시작과 종료 때만 울렸고, 선수들은 지난 2월 4대륙선수권대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열광의 현장”이라고.


김연아가 팬들의 극성스런 응원 때문에 경기력이 저하됐다는 혐의는 발견할 수 없었다. 김연아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의 부상이 많았던 건 팬들의 과도한 응원이나 빙질 때문이 아니었다.






그랑프리 파이널 아이스댄싱 우승을 차지한 이사벨 돌로벨-올리비에 쇼엔펠더. 배앓이로 몹시 고생한 이들은 “자신들 말고 다른 선수들도 고생했다”고 말했다. 유럽선수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아시아에 오면 배앓이를 겪곤 한다. 그러나 ISU가 과연 개최지가 유럽이었어도 입을 다물었을지는 의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이휘영)


러시아의 아이스댄싱 야나 코콜로바-세르게이 노비츠키 조는 12일 오리지널댄스에 불참하며 기권을 선언했다. 이때 ISU 관계자 어느 누구도 그들이 왜 기권했는지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 미국의 아이스댄싱 타니스 벨빈-벤자민 아고스토 조가 기권했을 때 “아고소토의 허리 통증 때문”이라고 밝힌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야나 코콜로바-세르게이 노비츠키 조의 기권은 다음날 아이스댄싱 우승을 차지한 이사벨 돌로벨-올리비에 쇼엔펠더 조의 인터뷰에서 이유가 밝혀졌다. 돌로벨이 “어제부터 배앓이가 심해 무척 고생했다”며 “나 말고 여러 선수가 배앓이로 고생했다”고 밝힌 것이다. 취재 결과 노비츠키는 심각한 배앓이로 출전은 고사하고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를 ISU가 취재진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홍보를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입을 다물었던 ISU가 팬들의 응원괴담을 불러온 것이다. 브라이언 쥬베르(프랑스)의 부상이나 선수들의 잦은 점프 실수도 그랑프리 파이널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이었지 팬들의 응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처럼,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처럼, 2008년 베이징올림픽처럼, 종목을 막론하고 팬들의 뜨거운 사랑과 그들의 환호를 펼칠 공간을 마련하는 건 해당연맹이나 협회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이다. 그러나 노력은 없었다. 피겨팬들은 지금껏 그들의 감정과 목소리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빙판 위로 던진 인형은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응원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건 그들을 더 넓은 피겨의 세계로 인도한 피터팬들을 향한 감사의 표시이자 상징이었다. 그리고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로라가 종속된 삶을 거부하고 여성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인형이 되길 포기했듯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피겨계와 ‘나와 상대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스포츠 근본주의자들을 향해 던지는 진정(眞情)이었다.


김연아는 결국 2번의 점프 실수가 독이 돼 종합점수에서 아사다에게 뒤졌다. 3년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이 좌절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피겨팬들은 낙담 대신 그들만의 시각으로 김연아의 성적을 이야기했다. “3년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메달 획득에 성공했다”고. 이것이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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