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3종대익리포트아시아 남자 높이뛰기의 1인자 이진택

아시아 남자 높이뛰기의 1인자 이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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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렉&필드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용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육상대회가 바로 트렉&필드 경기다. 육상은 49개의 세부종목으로 나뉜다. 트렉은 100m, 200m 등 트렉에서 열리는 종목이고 필드는 투척, 도약 등의 종목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들 종목은 흔히 말하는 ‘헝그리’ 종목이다. 그래서인지 49개 세부 종목 중 20개 종목에서 세운 한국 최고기록이 10년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 특히 서말구(53)가 1979년 9월 9일, 멕시코시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수립한 10초 34의 남자 100m 한국최고기록은 30년간 제자리 걸음이다.

국내 트렉필드 시장은 의류와 신발, 기타 용품으로 구성되는데 아식스와 미즈노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신발 쪽에서는 특히 단거리와 투척 도약은 미즈노가, 중장거리에서는 아식스가 강세를 보인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때문에 나이키에서도 트렉필드 시장에 뛰어들었다. 지난 2008년 10월, 7족의 트렉필드화를 공식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아디다스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IAAF와 11년이라는 초장기적인 후원계약을 맺어 내년 여름, 베를린에서 개최되는 ‘2009 IAAF 월드 챔피언십’부터 공식 스폰서로 활동한다.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공식홈페이지 http://www.2011daegu.org/pages/index.jsp
IAAF 공식홈페이지 http://www.iaaf.org/index.html


아시아 남자 높이뛰기의 1인자 이진택

이상철 기자 / 2008-12-17















이진택이 1997년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세운 2m34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사진 김수홍

마라톤의 황영조(38)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과 이봉주(38,삼성전자)는 1990년대 한국 육상의 위상을 높였다.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봉주는 4년 뒤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마라톤에서 황영조와 이봉주가 빛났다면 필드 종목에선 높이뛰기의 이진택(36) 주니어국가대표팀 감독이 두드러졌다.  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차지했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1999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결선에 진출했다. 한국이 낳은 ‘인간새’ 이진택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남자 높이뛰기의 1인자였다.


1991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시작으로 이진택은 수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해 여러 차례 입상했다.

한국 선수가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올림픽,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결선 무대를 수차례 밟았다.

1992년 5월 2일 제46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2m28로 첫 한국신기록을 작성한 이진택은 이후 6차례 더 한국 최고기록을 갈아 치웠다.

1997년 6월 20일 제26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세운 2m34는 11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입문

이진택은 어릴 때부터 또래들에 비해 키가 컸다. 학급에서 맨 뒷자리는 늘 이진택의 차지였다. 몸도 날랬다. 100m 달리기와 계주가 벌어질 때마다 반 대표로 뽑혔다.

이진택은 운동부의 스카우트 대상 1순위였다. 대구 아양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부가 가장 먼저 이진택 영입에 달려들었고 수영부 등 다른 운동부가 뒤를 따랐다.

운동에 호기심이 많았던 이진택은 큰 고민 없이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육상부에 들어갔다.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발목이 가는 이진택의 신체 조건은 달리기보다 높이뛰기에 알맞았다.

키가 크다. 정확하게 얼마나 되나.

190cm다. 대구 평리중학교에 입학할 때 164cm였는데 졸업할 때가 되니까 184cm였다. 3년 사이 20cm나 컸다.

집안 대대로 키가 크고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체질 때문에 스트레스다. 체중이 안 늘어 아직도 현역 때와 같은 72kg이다(웃음).

육상부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아양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학기 초 반 대항 달리기에 출전했다. 그때 육상부 담당 선생님이 육상부 가입을 권유했다.

부모님 반대도 없고 나도 운동에 관심이 많아 곧바로 육상부에 들었다. 신체 조건을 타고난 데다 배면 뛰기 등 자세가 나와 선생님이 “발전 가능성이 많다”며 좋게 평가하셨다.

키가 커 농구부, 배구부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평리중학교 3학년 때 왼쪽 무릎을 크게 다쳤다. 지루한 재활 치료를 하면서 높이뛰기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다른 운동을 해 보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그래서 농구부에 들어가려 했다.

또래 농구 선수들과 비교해 실력도 뒤지지 않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진학 과정이 복잡했다.

대구체육고등학교 농구부로 진학하기 위해선 일단 육상 특기자로 입학한 뒤 다시 농구부로 가야 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난 농구 선수로 평가받아 진학하고 싶었다. 미련 없이 농구 선수의 꿈을 버렸다.

대구 성광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중학교 시절까진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키가 더 크고 힘이 생겨 실력이 많이 향상됐다.

1989년 8월 26일 제18회 전국남녀중고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2m10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후 실력이 꾸준하게 늘어 여러 대회에서 우승했다.

높이뛰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선수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 이를 완전히 익히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데 난 습득 시간이 빨랐다.

신춘호 감독님의 지도 아래 기량이 크게 늘었다. 실력이 느는 게 느껴지니까 훈련할 때 신이 났다. 그땐 바를 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방황

이진택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제19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체육부장관기 제11회 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등 각종 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1990년 6월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인 아시아주니어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2m20으로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1위에 올랐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무서운 고교생’ 이진택을 국가대표팀에 포함했다. 파격적인 선발이었다.

당시 이진택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기록을 가진 선수가 많았다. 미래를 내다본 연맹의 결정이었다.

이진택은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세계주니어육상경기선수권대회 대표 선수로도 뽑혔다.

그러나 연이은 대표 발탁은 이진택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두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허리를 크게 다쳐 두 대회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대표로 뽑혔는데.

운이 좋았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았는데 연맹에서 발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나를 선발했다. 그때 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고 기록도 향상됐다.

그러나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는 나서지 못했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3주 전에 세계주니어육상경기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에서 훈련을 하다가 착지를 잘못해 허리를 다쳤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걸로 생각했는데 4, 5일이 지나도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어쩔 수 없이 세계주니어육상경기선수권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뛰고 싶었다. 대회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훈련 없이 재활 치료만 받았다.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 뛰는 건 무리였다.

대표팀이 베이징으로 출국하기 사흘 전 연맹 직원이 ‘선수촌에서 나가라’고 통보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땐 두 번 다시 태릉선수촌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아쉬움보다 창피했다. 퇴촌하고 학교로 돌아가니 교문에 나를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보니 차마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 곳곳에 ‘이진택 파이팅’이라는 현수막이 있었다. 난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병원에 치료 받으러 갈 때 빼고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는 봤나.

재활 치료를 하면서 텔레비전으로 봤다. 가슴 아팠고 내 자신이 초라했다. 방황도 많이 했다. ‘내가 있을 곳은 병원이 아니라 경기장인데’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편으론 반드시 재기해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뤄 보고 싶었다.

그해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했다.

제71회 전국체육대회는 내게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부상 복귀 후 첫 경기이기도 했지만 대학 진학 문제가 걸려 있었다. 잠재력을 갖췄다고 해도 부상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대학은 없다.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전국체육대회에서 2m10을 뛰어넘어 3위로 입상했다. 3위가 그토록 소중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전국체육대회 폐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팀에서 다시 날 불렀다. 두 번째 태극마크였지만 정말 믿기지 않았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게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낳은 것 같다.

허리를 크게 다친 뒤 부상 예방에 각별히 신경 쓰게 됐다. 기량을 키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치지 않고 잘하는 게 진짜 실력 있는 선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 몸에 맞게 훈련했고 부상 예방 훈련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10년 넘게 국가대표로 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도전

국내에 이진택의 맞수는 없었다. 이진택은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전국체육대회 12년 연속 금메달을 땄다. 경쟁은 없었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한국신기록 작성 여부가 관심거리였다. 남자 높이뛰기 1인자가 된 이진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높았다. 1991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1993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연이어 예선 탈락했다. 쓴맛을 여러 번 봤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예선 탈락할 때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열심히 훈련했다. 그리고 1997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1997년, 1999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결선에 진출했다.

1990년대 초반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다.

그땐 어렸고 국제 경험이 부족했다. 나보다 잘 뛰는 선수를 보고 긴장해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에 얼이 빠졌다. 당연히 기록이 좋을 리 없었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m20으로 예선 탈락했다. 당시 내 최고기록인 2m28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내겐 첫 올림픽 출전이었지만 기억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그냥 선배들을 따라 다녀온 정도일 뿐이다.

1990년대 중, 후반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그때가 전성기였다. 애틀랜타올림픽과 1997년, 1999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결선에 올랐고 1997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와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한국체육과학연구소 성낙준 박사의 도움과 많은 국제대회 출전 경험으로 1996년 이후 기록이 좋아졌다.












이진택은 요즘 선수들이 체격과 체력은 좋은 데 반해 집중력과 기술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사진 김수홍

하지만 올림픽,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육상선수로 올림픽과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같은 큰 대회 결선에 오른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애틀랜타올림픽에서 8위, 1999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6위에 그쳐 만족스럽진 않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시련

육상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기대감이 컸다. 그 어느 대회보다 메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마라톤의 이봉주와 높이뛰기의 이진택은 유력한 메달 후보였다. 연맹은 이진택을 1999년 12월부터 5개월 동안 독일 바이엘 약품의 육상 클럽으로 연수를 보냈다.

홀홀 단신으로 독일로 떠난 이진택은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훈련을 했지만 기량은 크게 늘지 않았다.

오히려 향수병에 시달리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이진택은 시드니올림픽에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m20의 형편 없는 기록이었다.

이진택은 시드니올림픽 이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더 이상 운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힘겨워 하던 이진택을 일으켜 세운 건 여자 높이뛰기 간판선수 김미옥(34)이었다.

이진택은 김미옥의 격려 속에 마음을 다잡고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2일 김미옥과 결혼했다.

기대와 달리 시드니올림픽에서 부진했다.

연맹의 지원 속에 독일 바이엘 약품의 육상 클럽으로 연수를 갔다. 지도자, 경기장 등 훈련 여건은 최고였다.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하지만 혼자 외국에서 지내는 게 힘들었다. 한국이 그리웠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게 슬럼프로 이어졌고 시드니올림픽에서 최악의 경기를 하게 됐다.

내 스스로 기대감이 컸던 대회였기에 실망감 또한 컸다. 시드니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운동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

아내인 김미옥의 도움이 컸다. 시드니올림픽 이후 많은 이들이 격려했지만 끝까지 날 챙겨준 건 아내밖에 없었다.

아내가 “2년 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명예롭게 은퇴하라”고 했다. 태릉선수촌에서 함께 운동하면서 큰 힘이 됐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딴 뒤 결혼을 발표했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 개막을 4개월 남겨 두고 결혼식 날짜 때문에 아내와 많이 다퉜다. 큰 대회를 앞두고 있어 2003년으로 결혼을 미뤘으면 했는데 아내는 꼭 2002년 12월에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내가 두 손을 들었다.

아내와의 연애는 대표팀 안에서도 전혀 몰랐다. 연애하느라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얘길 듣기 싫어 티를 내지 않았다.

언제 결혼 날짜를 밝혀야 할까 고민하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발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 꿈이 이뤄져 정말 기뻤다. 아내는 1위를 하지 못했지만(김미옥은 1m75로 7위를 기록했다).

은퇴

이진택은 은퇴를 두 번 했다. 대구체육고등학교의 체육교사로 임용된 뒤 2003년 9월 부산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그러나 이진택은 2년 뒤 선수로 복귀했다. 2006년 도하아시아경기대회에 나갈 대표팀에 수준급 높이뛰기 선수가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출산을 3개월 남겨 둔 아내가 유산했다. 아내를 위해 그는 다시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을 이겨 내지 못했다. 제86회 전국체육대회, 제35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등 현역 복귀 후 4개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목표로 삼았던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출전한 필리핀 오픈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2m05에 그치는 등 메달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째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2006년 7월 1일 주니어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3년 고별 경기를 가졌다.

2003년 개교한 대구체고의 체육교사로 임용돼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났다. 부산국제육상경기대회 준비위원회에 1997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날 가르쳤던 이재홍 동아대 감독님이 계셨다.

감독님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은퇴 경기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셨다. 정말 고마웠다. 학업을 하면서 틈틈이 운동을 했다. 2m23을 기록하며 1위로 현역 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2005년 1월 은퇴를 번복하고 대구시청에 입단했고 대표팀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다.

후배들의 기록이 전체적으로 저조했다. 연맹에선 자극제가 필요했고 내가 알맞다고 여겼다. 나 역시 선수 생활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국내대회에서 1위를 하니까 내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운동할 수 있는 대표팀 플레잉 코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사실은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한체대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휴직하려 했다. 그런데 대구체고에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나의 스타성 때문에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솔직히 교사는 안정된 직장 아닌가. 쉽게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출산 3개월을 남겨 두고 유산했다. 난 가정을 지켜야 했다. 곧바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시청 선수로 복귀했다.

현역 복귀 후 제86회 전국체육대회를 비롯해 4개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경기대회 3연속 우승을 목표로 훈련했다. 매일 선수들을 가르치고 난 뒤 1시간씩 개인 운동을 했다. 그런데 내가 대회마다 제자들을 제치고 1위를 하니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다.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고 개인 운동에만 전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내 기록도 예전 같지 않았다. 경쟁력이 떨어져 도하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돼 미련 없이 현역에서 물러났다.

2006년 7월부터 주니어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연맹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나보다 잘 뛰는 선수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남녀 높이뛰기 한국 최고기록은 10년 넘게 깨지지 않고 있다.

요즘 선수들은 체격과 체력은 좋은데 집중력과 기술이 부족하다. 연맹에서 “왜 제2의 이진택은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난 “미친 놈 하나 잡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집중력과 인내력, 열정을 가진 선수가 필요하다. 또 자주 국제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아야 한다.

열심히 운동하는 외에 방법이 없다. 그런데 선수들은 국제대회에 나가면 망신만 당할 텐데 왜 나가느냐고 한다. 지도자와 연맹의 문제도 있겠지만 선수들의 문제가 더 크다.

한국 육상에 희망은 있는가.

육상 선수층이 얇아지고 있지만 재능 있는 선수도 많다. 이 때문에 연맹의 기대가 크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직은 많이 모자란다. 2011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메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다. 3년 뒤에는 분명 지금보다 나아져 있을 것이다. 난 한국 육상 발전의 주춧돌이 되고 싶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이진택의 개인 최고기록은 2m34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저메인 메이슨(25,영국)이 2m34로 은메달을 땄다.

이진택이 베이징올림픽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냈다면 한국 육상 사상 첫 필드 종목 메달 획득이 가능했다.

최근 높이뛰기의 세계적인 추세는 이진택이 뛰었던 시대에 견줘 하향세다. 육상 관계자들은 “이진택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진택은 이런 얘기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진택은 “내가 2m34의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건 하비에르 소토마이어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뤘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수준이라면 2m30을 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택에게 2m45의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 소토마이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그런데 이진택이 소토마이어를 꺾는 사건이 일어났다. 1997년 8월 26일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이진택은 2m32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기쁨도 잠시, 이튿날부터 다시 운동을 했고 11일 뒤 일본에서 열린 토토국제수퍼육상대회에 참가했다. 소토마이어는 초청 선수 자격으로 출전했다.













SPORTS2.0

이진택은 2m29로 8위에 올랐지만 소토마이어는 입상하지 못했다. 이진택은 “소토마이어는 경기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난 기뻤다. 그 이후 어느 선수와 겨뤄도 두렵지 않았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진택

생년월일│1972년 11월 24일
신체조건│190cm, 72kg
학력│대구 아양초-대구 평리중-대구 성광고-경북대
경력│대동은행-대구시청
주요 성적│1991년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위
1993년 상하이동아시아경기대회 2위
1993년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위
1994년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 2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8위
1997년 부산동아시아경기대회 1위
1997년 시칠리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1위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1위
1999년 팔마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3위
1999년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6위
2001년 오사카동아시아경기대회 1위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1위


SPORTS2.0 제 133호(발행일 12월8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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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 안전부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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