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나이키·아이다스와 정반대로 간 ‘잡스 운동화’가 먹힌 이유

美 신발업체 ‘뉴발란스’ 짐 데이비스 회장
잡스가 신은 운동화…나이키·아디다스와 정반대로 마케팅… 그래도 세계 넘버3
美 공장 가진 유일한 메이저 운동화… 임금 비싸도 효율은 10배

운동화 한켤레 만드는데 미국선 70분이면 충분

美소비자 취향 맞추는 건 국내 공장·판매망이 유리

91년 9500만 달러던 매출, 스타 광고모델 안썼지만 2009년엔 무려 27억달러

애플의 신제품 출시 프레젠테이션 무대. 거대한 애플 아이콘을 배경으로 스티브 잡스가 등장한다. 테 없는 안경, 검은 터틀넥 티셔츠, 색 바랜 청바지. 애플의 디자인 철학인 ‘단순함(simplicity)’을 대변하는 옷차림에 잡스는 작은 반전을 준다. 그것은 그가 신고 나타난 회색 뉴발란스(New Balance) 운동화 993모델. 잡스가 걸치고 나온 것 중 유일하게 브랜드가 표시된(측면에 ‘N’자 로고가 박혔다) 제품으로, 1980년대 처음 나온 초기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해 ‘러닝화의 고전’으로 불린다. 비즈니스 위크 등 미국 언론은 뉴발란스 운동화 뒤에 숨은 잡스의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잡스의 신발(뉴발란스)은 잡스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한 조각이다. 세계 최대 IT기업 CEO는 젊고 민첩하다. 아침에 단 몇 분이라도 아껴 애플에 집중하기 위해 운동화를 신고 뛴다. 겉치레에 지쳐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고객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다. 그리고 그는 누구와도 길을 걸으며, 애플의 앞날에 대해 얘기할 자세가 돼 있다….”

의도하지 않게 세계적 거물을 모델로 쓰게 된 뉴발란스의 짐 데이비스(Jim Davis·65) 회장은 잡스와 뉴발란스와의 인연에 대해 “노 코멘트”라며 입을 다물면서도, 두 기업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최상의 제품에 대한 집요함. 고객이 뭘 원하는지 포착해내는 탁월한 감각.”

뉴발란스는 아직도 미국에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유일한 메이저 운동화 브랜드다. 뉴잉글랜드 지역 5개 공장에서 일하는 1300여명의 직원이 매년 미국에서 팔리는 운동화 총량의 4분의 1(700만 켤레)을 담당하고 있다. 나머지 분량은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하듯 중국베트남에서 제조공장을 돌려 원가를 절감한다.

“미국 공장은 우리에게 절대 손해가 아니다. ‘메이드 인 USA’를 통해 고객들로부터 제품 퀄리티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미국 내 매장에 직접 배송되기 때문에 보관·운송비도 절약된다. 대신 우리는 돈이 많이 드는 스타마케팅이나 대대적인 TV광고를 하지 않는다. 운동화에 구현 가능한 기술과 퀄리티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할 뿐이다.”

뉴발란스의 마케팅 전략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I-Values’로 불린다. ‘I-Values’란 Identity(정체성) Values의 줄임말로, 현대 소비자들은 제품을 통해 진정한 자아(혹은 내면)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마이클 조던·데이비드 베컴 등 수퍼스타들을 내세워 승리(winning)나 1등을 강조한 광고를 내보내는 사이 뉴발란스는 반대의 길을 갔다. 노을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의 이미지,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광고문구 등을 통해 소비자들의 상승욕이 아닌 나르시시즘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 미국의 뉴발란스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받은 시급은 12달러 정도다. 중국 근로자보다 10배 이상을 더 받는다. 그나마 중국 근로자 임금이 올라가 격차가 줄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발란스는 제품 4분의 1을 미국 제조업의 힘에 기대고 있다.

“미국 공장은 마케팅 차원에서 하는 상징적인 조치가 아니다. 미국에서 운동화를 생산하면 인건비는 올라갈지 몰라도 생산효율은 아시아 공장에 비해 열 배나 높다. 자동화 공정을 자랑하는 미국의 공장에서 운동화 한 켤레가 만들어지는데 70분이 걸리고 이 중 수작업은 25분에 불과하다. 아시아 공장에서는 수작업에만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우리는 미국에도 얼마든지 제조업이 부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난 1월 서울에서 만난 짐 데이비스 회장은 자신의 뉴발란스 993모델을 보여주며 “운동화에 구현 가능한 기술과 퀄리티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는 것이 우리 철학”이라고 말했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1991년 9500만 달러였던 뉴발란스의 연 매출은 20년간 한 번도 꺾이지 않았고 2009년 27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뉴발란스는 전 세계 120여 개국에서 팔리는 세계 3위의 운동화 브랜드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짐 데이비스 뉴발란스 회장은 뉴발란스 셔츠와 ‘잡스의 신발’인 993모델을 신고 나타났다. 45분간 조깅을 한 후라고 했다. 탄탄한 몸매에 좀처럼 웃지 않는 건조한 표정이었다. 언론노출을 꺼려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반년이 넘게 걸렸다.

도요타에서 배웠다

짐 데이비스 회장은 공장 효율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인건비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2004년 뉴발란스 경영진이 간 곳은 조지타운의 도요타 공장. 필요할 때마다 정확한 양의 부품을 공급해 재고를 최소화하는 도요타식 생산 방식을 관찰했고 이를 운동화 제작 과정에 적용했다. 그러자 재고로 인해 발생하던 비용 중 50만 달러가 절감됐다. 이전까지 독립된 파트별로 진행됐던 재료 커팅, 바느질, 패턴 작업을 한 공간에 몰아넣으니 제작 시간도 단축됐고 공간도 40% 이상 절약할 수 있었다. 제품 불량도 줄었다. 바느질이라도 잘못되면 팀의 누구라도 실수를 지적했고, 누군가 작업을 끝내지 못해 공정이 지연되면 다른 이가 도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만 해도 미국의 공장에서 뉴발란스 운동화 한 켤레를 만드는 데 8일이 걸렸지만, 지금 그 시간이 70분으로 줄었다.

70분의 시간 중 운동화 밑창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초. 첨단기술을 적용한 몰딩 작업과 로봇공학의 결합 덕분이다. 밑창은 신발의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 주문량과 종류에 신속하게 대응하려면 밑창 제조 속도가 중요하다.

“운동화는 패션이다. 유행을 탄다. 연령, 지역, 취향에 따라 다양한 니즈가 존재한다. 국내에 공장이 있으면 판매망을 가늘고 촘촘하게 더 깊숙이 뻗을 수 있다. 시중에 잘 구할 수 없는 사이즈와 발볼 너비를 가진 소비자의 주문, 독특한 색감이나 디자인을 원하는 이들의 욕구에도 응할 수 있다. 덩치 큰 경쟁업체들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다.”

―운동화 제조업체 간 기술경쟁이 치열하다. 착용감, 안전성, 무게절감, 몸매교정까지…. 뉴발란스는 기술혁신을 어떻게 이뤄내고 있나?

“뉴발란스 디자인 스튜디오와 스포츠 리서치 연구소를 둬 생체역학, 스포츠과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품 디자인을 개발하고 기능성을 향상시키고 있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의 신체운동학과 박사과정 학생들이 우리 연구소에 와 개발에 참여한다. 운동화의 기능은 많아지고 있지만, 디자인은 미니멀리즘이 환영받는 추세다. 운동화마다 핵심기능을 강화하고 소비자들이 이에 주목할 수 있도록 디자인은 심플하게 가고 있다. 올해 새로 출시하는 뉴발란스 러닝화인 ‘뉴발란스 미니머스’도 그런 추세에 따라 개발된 신발이다.”

―모델명이 따로 없고 990, 991, 992 등 숫자로 구분되는데?

“모델명이 따로 없다. 원래 이런 숫자 시스템은 가격에서 왔다. 트랙커 320은 32달러, 990은 99달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 모델 숫자는 안정성이나 무게처럼 신발 기능의 범위를 나타내고 있다. 즉 모델명에 운동화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물론 우리도 어떤 운동화에 거창한 모델명을 붙여 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운동화는 언덕을 오르기 위한 신 아니겠는가. ‘기능우선’은 뉴발란스의 철학이다.”

◇달리기 붐에 올라타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품 설명회에서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무대 위를 걷고 있다. / AFP

뉴발란스는 1906년 윌리엄 라일리(Riley)가 만든 회사로, 라일리는 발을 안정적으로 지지해주는 ‘아치서포트’(arch support)를 개발해 팔았다. 아치서포트는 사람의 발바닥 중앙에 볼록 들어간 부분인 아치를 받쳐줘 편안함과 균형감을 주는 일종의 신발 깔창이다.

―신발 깔창을 만들던 회사가 3위의 운동화 브랜드가 된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 회사 이름이 뉴발란스다. 실제로 인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능은 신발의 핵심이다. 그런 마이크로한 데서 기술력을 축적해 1938년 세계 최초로 러닝화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깔창에서 시작한 회사라 발의 모양이나 사이즈의 다양성에도 일찍부터 주목했다. 발 너비에 따른 사이즈 구분도 뉴발란스가 업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최초는 또 있다. ‘트랙스터’라는 물결무늬의 고무 밑창을 단 러닝화를 세계 최초로 디자인·제작한 것도 뉴발란스였다.”

트랙스터는 잘 미끄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YMCA와 MIT·터프츠대·보스턴대 운동부에서 단체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선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도 늘기 시작했다. 뉴발란스를 대중적 브랜드로 키워놓은 것은 짐 데이비스 회장이었다. 그는 197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날 뉴발란스를 사들였다.

“1970년대는 경제적 풍요의 시기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달리기 붐이 일었다. 마라톤 대회가 여기저기서 열리면서 평범한 사람들도 보다 좋은 운동화를 갖고 싶어했다. 스포츠용품 시장이 팽창하리란 것은 사업가라면 누구라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짜 달리기를 한다는 사람들은 뉴발란스라는 운동화를 신는다’고 했다. 당시 뉴발란스는 6명이 하루 30켤레의 운동화를 만드는 정도의 규모였다.”

1975년 데이비스 회장은 뉴발란스 고유의 ‘N’자 로고를 만들어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마라토너 톰 플래밍이 뉴발란스 320을 신고 뉴욕 마라톤 대회에 나가 우승했고 세계적인 러닝잡지인 ‘러너스 월드’(Runner’s World)로부터 최고의 신발로 선정됐다.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다

“한 여성이 저녁노을을 향해 뜁니다. 한 여성은 조금 더 멀리 나아갑니다. 또 한 여성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수록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여성은 한명 더 줄어듭니다.”

2000년대 초 뉴발란스의 광고 카피다. 경쟁자인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경쟁과 승리, 1등을 마케팅의 키워드로 내세워 소비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뉴발란스는 스타마케팅도 하지 않았다. 뉴발란스 광고 사진에는 홀로 뛰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1등 경쟁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었다. 소비자들은 사회적 자아가 아닌 본래의 정체성과 내면에 집중하고 싶었고, 뉴발란스의 온건한 마케팅전략은 그런 욕구를 자극했다. 또, 대부분의 사람이 조깅이나 자전거타기 등 혼자 하는 운동을 즐겼기 때문에 자기애를 부추기는 광고문구는 경쟁자들 틈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유명 가수인 에릭 클랩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스티브 잡스 등 성공한 중년들이 뉴발란스의 팬이라고 들었는데?

“경쟁업체들은 십대 고객들을 잡는데 열중한다. 우리도 디자인을 개선하고 화려한 색상을 집어넣어 젊은층을 공략하고는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젊은 인구는 감소추세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중년·노년 고객들이 오히려 운동에 열심이다. 1970년대부터 우리 신발을 애용했던 중년 고객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초기 모델에서 큰 변화를 주지 않은 기능성 운동화를 계속 만들어 팔고 있다. 잡스가 신었던 993모델만 하더라도 초기 형태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스타마케팅에 의존한 요란한 광고를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충성도 높은 중년층 고객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한번 뉴발란스를 이용한 고객들은 웬만해선 경쟁업체로 가지 않는다.”

―모두가 젊은 스포츠 스타를 모델로 쓴다. 그런 유혹을 느껴본 적은 없나?

“사실 운동화를 신었을 때 편하고 기능이 뛰어나다면 누가 신었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제조업체로 시작했고, ‘물건이 좋으면 최고’라는 문화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인건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전혀 다른 업종인 도요타의 생산방식을 도입한 이유기도 하다. 경쟁자들이 모두 한길로 가 다툴 때, 그 속에 뛰어들어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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