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을 만든 스니커즈 디자이너 – indaShoe 성호동 부사장

조던을 만든 스니커즈 디자이너 – indaShoe 성호동 부사장

나이키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분, 신발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한 분, 회사 아이덴티티와 그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신발 업체분, 요즘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모르겠는 분이라면 이 인터뷰를 경청하시기 바란다. ‘문제란 없다, 도전만이 있을 뿐’이라는 패기 하나만 가지고 떠났던 ex-나이키ㆍ아디다스 디자이너 성부사장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글ㅣ사진ㅣStreetFoot


“슈즈 마니아 되기”
12살 때 친구 한 명이 미국에서 NBA 하이라이트 비디오를 가져왔다. 그때 처음 마이클 조던이란 선수를 알게 됐고, 마이클 조던이 덩크슛을 프리드로 라인에서 한다거나 갖은 기교를 부리면서 상상치 못했던 기술을 보여주는 것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쪽이 예술가 집안이고 아버지 쪽이 체육쪽 집안이다보니 그 전부터 운동이나 디자인 방면에 열정이 있었다. 운동화가 너무 좋았고, 용돈 아껴서 사 신고, 다 신고 떨어질 만하면 톱으로 짤라서 안도 들여다보고. 나에겐 뭔가 식스센스(육감)가 있는 것 같았다. 언어구사가 짧아서 쿠셔닝, 서포트를 구분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했지만 그런 걸 느꼈으니 말이다. 나이키를 신었을 때와 아디다스를 신었을 때 다른 점 같은 것 말이다. 여러 켤레를 사서 차고에 쌓아놓았는데 부모님은 ‘이 미친놈아, 뭐가 될라고 그러니’하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여튼 친구가 가져온 비디오를 보면서 조던이 신은 운동화가 이제는 히스토리인 에어 조던이란 걸 알게 되었고, 어릴 때 테니스를 하다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가면서 키가 갑자기 커서 농구를 하게 된 나는 당연히 조던을 신었다. 그걸 신는다고 조던처럼 잘 하지야 않지만 마케팅 빅팀(희생자)이라고 하던가. 농구를 시작하면서 열정이 더 커졌고 이걸 누가 디자인을 할까, 내가 이걸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런 궁금증이 너무너무 많았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청계천에 가도 잡지는 건축과 패션밖에 없었고, 정말 정보에 대한 목마름이 너무너무 컸다. 그래서 스트릿풋 독자 중에도 운동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분이 있으면 정말 발 벗고 도와주고 싶다. 여튼 올림픽 끝나고 이태원을 돌아다니면서 외국에서도 출시 안 된 하자제품이라든가 그런 것을 샀는데, 그때의 슈택을 모두 모아놓았다. 지금이야 지사가 법인으로 들어와서 한글로 설명이 다 있지만 그때는 영어만 있었고 인솔, 아웃솔, PU 이런 건 사전을 찾아봐도 없었다. 그 목마름을 잘 기억하기에 경험이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기회가 너무 고마운 것 같다.

“무작정 유학 떠나기”
운동화 디자인을 하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어느 과를 가야하는지 부수적으로 뭘 해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혔다. 일단 미술, 디자인을 해야 되는 건 알겠고, 운동화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본능적으로 일었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는데, 어떤 대학을 가서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직장을 얻어야겠다는 건 그냥 상상 수준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 외국을 나가는 게 자유로우니까 군대를 일단 갔다. 군대 있을 때도 만날 영어 공부하고, 작대기 두 개 달고는 만날 농구하고, 좀 유별나게 보낸 것 같다. 그리고서 말년 휴가를 나왔는데 인터넷이 조금 보급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학교를 알아보는데 아버지나 가족들이 디자인하는 것을 굉장히 반대를 했다. 이래저래 내가 학비를 크게 댈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당시 미국쪽은 유학생한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그 당시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포기해야 했다. 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쪽에 유명한 디자인 스쿨이 많았지만 영어는 능통하지만 유럽으로 가면 강의 따라가기가 어렵겠다 싶어서 차선책으로 호주를 선택했다. RMIT,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이라고 호주에서 디자인으로 제일 유명한 곳에 장학제도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장학금을 받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나는 제대하고 2주 만에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신입생은 3명이 장학금을 받는데 1등은 학비 전액과 생활비, 2등은 학비, 3등은 학비의 50%가 지급이 되는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낸 결과 4등을 하고 말았다. 마이클 조던이 덩크하는 것을 핸드 드로잉한 작품과 “나는 운동화 디자이너가 되고 싶고 기계공학도 알아야 하고 장학금도 받아야 한다.”고 절절하게 썼지만 결과가 그러니 짐을 싸서 돌아오는 수밖에. 그런데 다행히 2등을 한 학생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난 3등으로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포트폴리오로 냈던 조던 그림은, 나중에 나이키 디자이너로 일할 때 조던에게 선물로 주었고 지금 조던의 아들 방에 걸려 있다.

“끝없이 어플라이 하여 나이키 입사하기”
입학해서 공부를 하면서 졸업하기 전에 ‘아드레날린’이라는 나이키 인턴십에 수없이 어플라이를 했다.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HR(휴먼 리소스-인사과) 매니저가 너의 포트폴리오는 좋지만 미국은 파트 타임 잡에 워킹 스폰서 비자를 줄 수 없다, 그러니 풀 타임 잡의 기회가 왔을 때 다시 얘기를 하자는 이메일이 대학교 3학년 때 나이키 본사에서 처음으로 왔다. 그 메일을 프린트한 종이가 지금도 있는데 이건 첫사랑 러브 레터보다 더 뭉클한… 그후 졸업 작품을 5일 동안 4시간 자가면서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많이 만들었고 그중에 운동화도 두 작품이 있어서 엑스게임, 스케이트보딩 쪽 호주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거기서도 3개월에 한 번씩은 포지션이 오픈되건 안 되건 나이키에 계속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그렇게 나에게 답신을 줬던 HR 매니저한테 3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가 와서 HR팀, 디자인팀과 전화인터뷰를 하고, 파이널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화상 인터뷰도 하고, 그리고서 오퍼를 받았다! 그렇게 호주에서 미국으로 떴다. 나이키에 입사 후에도 막 조던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졸라서 결국 들어갔다. 그렇게 나의 우상이던 조던과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게 되었다.



“디자이너라면 꿈꿀 수밖에 없는 유럽행”
그러던 중 입사 2년 차에 유럽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독일, 영국, 이태리를 갔는데 유럽이라는 곳이 디자이너에게는 가는 골목골목마다 영감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하다못해 밥 먹으러 간 식당 손잡이도 디테일이 장난이 아니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소스가 너무 많으니까 입 헤벌리고 돌아다녔다. 물론 미국이 강대국이지만 역사의 깊이는 따라갈 수가 없구나, 왜 미국에는 엔터테이너가 많이 나오고 왜 유럽에는 아티스트가 많이 나오는지 그 이유가 있구나. 그래서 내가 가족도 없고 싱글일 때 이런 유럽에서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리쿠르트 에이전시를 통해서 아디다스 쪽 제안을 받긴 했지만 그때는 나이키 포틀랜드 본사가 좋으니까 매력을 못 느꼈는데 나중에 독일 본사 이노베이션 팀에 시니어 디자이너 포지션이 났다. 갑자기 심장이 막 뛰는 거다. 아디다스는 나이키가 없는 유럽의 전통과 클래식한 분위기가 있는데 그네들의 디자인 방식과 사고방식은 과연 어떨지 아주 궁금했다. 무엇보다 유럽이라는 큰 매력이 있으니까 주저 없이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차이”
독일 같은 경우는 굉장히 엔지니어한 기술과학, 그리고 군더더기 없음, 이런 특징이 강하다. 같은 유럽이라도 이태리 디자인 같은 경우는 감성을 중시하는데 자동차로 비교하자면 이태리 람보르기니는 고장이 많고 허허실실이 많다. 감성을 위해 그런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에 비해 독일 포르셰 같은 경우는 화려함은 없는데 무난하게, 돈 있는 사람이 출퇴근하면서 유지보수에 공 안 들여도 되고, 그렇다고 퍼포먼스를 희생하는 것도 하나 없는 그런 차다. 독일의 무뚝뚝하면서도 원칙적인 마인드는 시간이 얼마 걸려도 좋으니까 이 부분은 반드시 해결하고 나가자, 그런 자세가 있다. 디자인 하는 분들이 잘 알겠지만 바우하우스와 일본, 프랑스 같은 곳을 비교하면 바우하우스는 단순함과 기능성에 굉장히 포커싱을 맞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반면 나이키 같은 경우는 감성과 사람의 상상력이 합쳐져서 새로운 어떤 것으로 가닿게 만드는 데 치중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데 시간과 돈을 거리낌 없이 쓴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아디다스가 중간에 나이키의 그런 정서를 표방하면서 자기들 것을 놓칠 뻔한 과오기가 있었다. 리복 같은 경우는 아직도 그게 조금 있는 것 같고. 시장경제의 원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의 디자인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건 나이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키는 사원들이 나이키 문화에 푹 빠지게 만든다. 아주 절인다고 말할 수 있다. 큰 체육관이 있는데 농구장, 축구장도 두 개, 암벽등반, 테니스장 등등,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국인 곳이다. 거기서 농구 리그전, 수영대회 등등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고, 나이키 히스토리나 문화,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나이키의 가장 큰 힘은, 나이키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 촌동네 포틀랜드까지 말이다. 그래서 임원 중에는 주말마다 비행기 타고 뉴욕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정말 사랑과 열정이라는 게 경험과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여튼 나이키에서는 멤버가 계속 그 안에 있으면 어떻게 직급이 올라가고 어떤 일을 할지 선택의 여유를 주고,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어떤 훈련을 받을지 많은 지원을 해준다. 너는 이런 걸 잘 하는 것 같으니까 이런 훈련을 받아서 이런 걸 해봐라 하는 식으로 인력이 관리된다. 그래서 그냥 오래 있었으니까 내가 터주대감, 이런 사람이 없고 변화와 발전,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최대화하는 것 같다.

“다시 한국으로 오기”
난 운이 꽤 좋았던 것 같다. 십 몇 년을 갈망하며 직장을 잡은 이후에 내 방에 포스터를 걸어놓고 우러르던 사람과 미팅을 하고, 그가 신이 아니구나 하는 공허함도 느끼고. 애용하고 신던 운동화를 내가 디자인해서 신을 수 있고. 년 시절엔 내가 디자인한 신발 신은 사람을 보면 그거 내가 디자인했다고 얘기하고 싶고 거리에서 막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근데 그만큼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의 어떤 공허함이 있었다. 처음 러닝화팀에 들어가서 원하던 샥스 TL 4를 디자인 했는데 입사 1년 반 됐던 애가 그런 걸 진행한 유래가 없었고, 굉장히 배타적이었던 조던팀에도 겨우 2년 차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지만 난 직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듯 직급이 올라가는 것에 관심이 참 없다. 부와 명예를 누리겠다는 게 꿈이었다면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그래서 다음 꿈이 뭔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이 한국에 있고 직장이 외국에 있으면, 휴가가 많아도 한꺼번에 다 받아서 한국에 있다 갈 수가 없다. 프로젝트 진행은 일정이 겹치는 작업인데, 예를 들어 내가 시즌 당 두세 개 제품을 진행을 한다. 그러면 내가 디자인한 제품의 프로토 타입이 오는 과정에서 나는 다음 시즌 제품을 디자인 하고, 그거 발표하면 이전의 프로토 타입이 공장에 도착하니까 그 제작 작업을 컨트롤 해야 하고. 그래서 2~3주를 비워버리면 ‘이거 내가 디자인한 거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데’라는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한국에 와도 1주일밖에 못 있는데 비싼 돈 들여가며 계속 왔다갔다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친구들, 가족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얻고 싶다는 목표를 한 가지 설정하게 됐고, 또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꼭 한 브랜드만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가하는 의문에 여러 브랜드 작업을 하는 일이면 좋겠다는 목표를 설정했고(내가 진짜 굉장한 아이디어가 있다 해도 기업의 아이덴티티 문제 때문에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으면 시장에 나올 수가 없어서 디자이너로서는 아쉬울 때가 많다.), 그리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있었다. 아디다스로 옮기던 시기에 그런 생각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찾아보면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독일과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인다슈와 인연이 닿아서 이렇게 한국 지사로 오게 되었다. 아시아 쪽에 체계적이고 시스템이 확립된 어떤 시장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싶다.

“인다슈란 회사는”
독일계 미국인 사장님이 독일과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인데, 그분이 광범위한 커넥션이 있으셔서 글로벌하게 운영되고 있는 디자인 회사이다. 나는 나이키에서 3년 반, 아디다스에서 1년을 지냈는데 아디다스에 있던 친구를 통해 사장님과 연결이 되었다. 당시 큰 회사를 거친 상태였던 나는 매일 아침 똑같이 일어나서 똑같은 책상에 가가지고 똑같은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게 따분하고 고리타분해서 새로운 게 없을까 하며 사업을 고민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마침 뜻이 모아졌다. 그분이 가진 디자인, 마케팅 소스와 내가 아는 미국의 커넥션을 합해서 글로벌 네트워크로 만들어보자, 그렇게 회사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인다슈로 런칭을 한 것은 6개월밖에 안 됐다. 기존에 미국과 독일에 있던 디자이너들은 계속 있고, 호주 오피스는 디자이너를 새로 영입한 상태로 내년에 오픈을 하려고 한다. 내가 한국에 온 것은 일본이 주는 아시아 마켓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시장조사 겸 개척 겸 왔는데 한국에 온지 2주밖에 안 됐다. 아무래도 한국인이니까 한국에 오게 돼서 좋았다. 일본과 중국을 커버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실 한국으로 가겠다고 졸라서 왔다. (웃음)

“인다슈의 목표”
목표는 단순하다. 우리의 디자인 능력을 믿고 우리 능력을 원하시는 분들한테 세계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다. 스포츠 브랜드는 물론, “우린 스포츠 브랜드가 아니고 패션 브랜드이지만 우리의 운동화는 인체공학적인 설계가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어떤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를 사업적으로 콤비네이션 시킨 종합적인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오면 어떤 브랜드건, 규모가 어찌 되건 그런 모든 분들은 우리의 고객이다. 그런 분들께 최고의 디자인 컨설팅을 서비스하는 것이 인다슈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신발에서 퍼포먼스란”
숍에 갔는데 진열대 위아래로 하이 퍼포먼스부터 로우 퍼포먼스를 진열해놨다고 하자. 그렇다고 로우 퍼포먼스가 퍼포먼스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런 점은, 우리가 업체를 처음 컨설팅하는 단계부터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일주일에 한 번 뛸까말까 하는 사람과 매일 뛰는 사람이 원하는 기능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전자의 신발에 퍼포먼스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명품 브랜드들(난 우리나라의 명품이란 단어에 의문점이 좀 있지만)이 스니커즈 라인을 런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거기에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하면 우리한텐 고객이다. 그냥 걸어다니는 사람부터, ‘난 알마니를 빼입고 시선을 받으면서 뛰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우리에게는 모두 운동선수인 것이다.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회사”
모든 운동화가 잘 팔릴 순 없다. 운동화마다 목적이 다르고 하는 기능이 다르다. 큰 브랜드가 있고 그 밑으로 카테고리가 나눠지게 마련이다. 전략적인 것들을 조금 말하자면, 운동화 회사는 스포츠의 열정이나 땀 냄새, 관람 스포츠가 주는 감정의 기복, 이런 최고의 드라마를 고려해 컴퍼니 이미지를 어떻게 다르게 만들지, 회사 로고나 슬로건을 어떤 걸로 해야 할지, 그 다르게 한 이미지를 프로덕트에 어떻게 녹여내어 어떤 디자인의 옷을 입힐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디자인-마케팅-비즈니스 전략의 기본이다.
특히 요즘은 기능이나 품질로 제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감성으로 선택하는 시대여서 더욱 그렇다. 할리 데이비슨이 성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유스럽고 하드보일드한 감성이 있기 때문에 선택되고, 일본 제품들은 일본인 특유의 근면성과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좋아서 선택되듯이 말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신발에 마니아층이 형성되는 것은 신발 안에 어떤 어떤 기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저 신발이 어떤 히스토리와 이미지와 마케팅 전략이 있기 때문에 나와 부합된다, 날 대표해줄 수 있다는 정서적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신발”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죽겠다. 말씀은 못 드리지만. (웃음) 다만 ‘지금 이런 게 유행이다’ 이런 거에는 관심이 아주 없다. 이런 이런 게 유행할 거 같아, 이런 걸 해서 사람들 지갑을 열게 해야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영감이 시도 때도 없이 오고 목적과 목표가 설정이 됐을 때, 내 아이디어가 여기 있고 목표가 저기 있는데 중간에 어떤 브랜드에서 바로 그걸 원했다, 함께 하자는 요청이 있을 때, 그래서 ‘내가 아는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이 이걸 할 수 있습니다’하고 이 모두가 얼라인(일치)이 됐을 때 실패할 확률도 적고 시너지도 훨씬 클 것이다. 물론 내가 돈이 너무 많아서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팔리건 안 팔리건 공장에서 막 찍는다, 이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다. (웃음) 목적 있는 디자인, 비전 있는 사업, 그것이 전략적인 마케팅이다.

“인다슈의 아시아 거점”
내가 한국에 온지 이제 2주가 되었는데 아직 어느 나라를 아시아 거점으로 할지는 시장조사를 하고 있는 시점이다. BIFOS 부산쇼에 갔는데 많은 업체분들이 “그런 것도 해요?”라고 물으시고, 한 걸 보여드리니까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하면서 굉장히 낯설어하셨다. 계속 설명드릴 수는 없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많았는데 한국분들도 많이 이용하시고, 일본과 홍콩도 커버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거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메스틱 브랜드나 아시아에서 브랜딩해서 유럽이나 미주로 수출하는 브랜드 업체들에 도움이 되고 싶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브랜드가 나올까?”
나도 의문이다. 정말 의문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문은 아니다. 내 모토 중 하나가 ‘프라블럼이란 건 없다’는 것이다. There’s no problem, only challenge.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즐겁다. 나도 한국에 오면서 그런 똑같은 질문을 해봤는데 답을 모른다. (웃음) 그래서 즐거운 거다. 답을 안다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된다는 답을 알 때, 하면서 재미가 있을까? 열정 120%를 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 일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요즘 즐겨 신는 신발”
요즘은 사업 때문에 정장을 입느라 지금 신은 건 브라마스라는 이태리 브랜드다. 발통이 나랑 잘 맞는다. 일하는 시간이 아닐 때는 조던 레인 23이라는 농구화도 신는다. 노스캐롤라이나 컬러로 흰색에 블루의 작년 제품인데 찾아보니 한국엔 안 들어왔더라. 에어 맥스 90 아이팟 유럽 버전도 즐겨 신고 있다. 어제 의정부 실내체육관에서 농구를 했는데 상대팀은 계속 해오던 팀이었는지 무척 잘 해서 네 게임 해서 다 졌다. (웃음) 모두가 생활스포츠를 즐기면 좋을 텐데 체육관에서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별로 안 되어 있어서 굉장히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쿠셔닝”
줌 에어가 꽤 좋다고 생각한다. 에어는 중간이 비어있는 구조여서 충격흡수는 좋지만, 발바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인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줌 에어는 수백 수천 개의 텐실이 충격을 완화하면서 밑바닥의 감을 전달해 준다. 그리고 아디다스 포모션도 충격흡수를 위한 수십 개의 구조물이 비스듬하게 수평으로 서 있어서 쿠셔닝이 뛰어나다. 러닝을 할 때 신고 있는데 굉장히 좋은 것 같다. 러닝 습관 중 헤비 힐 스트라이커라고, 뒤꿈치를 크게 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포모션이 탁 받쳐주면서 임팩트가 트랜지션(전이) 되는 게 느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많이 신는다. 어릴 적부터 버릇이라서.

“컬렉터 vs 테스터”
나이키 있을 때는 2년 차 즈음에 프로토 타입, 샘플까지 해서 480켤레가 있었는데 거기서 세는 걸 포기했다. 그 후로 1년을 더 모았고, 유럽으로 가면서 많이 정리했다. 난 컬렉터는 아닌 것 같다. 컬렉터는 그냥 모으는 사람들이란 정의가 맞을 텐데 난 사서 다 신는다. 신발은 신으라고 있는 것이고 신으면서 값어치가 빛나는 것이니 말이다. 일정 공간에 두고 신처럼 떠받들기보다는 성실한 테스터이다.

“귀고리, 행커치프, 시계는 흑인 패션”
이거 다 백인숍에서 샀는데… (웃음) ‘힙합’한 건 아니고 ‘힙’한 걸 좋아한다. 뉴욕 양키즈 모자를 써도 브림을 편편하게 해서 상표 붙이고 삐딱하게 쓰기보다는 약간 챙을 구부려서 정면을 향하게 쓴다.

 

“인다슈 부사장으로서 하고 싶은 말”
많이 찾아주세요. (웃음) 근데 사실 기업체이기 전에 이건 문화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스트릿풋뿐 아니라 패션, 스트리트, 스포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어떤 매개체로 엮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모든 기업체의 목적이지만 돈 버는 것 이외에 이런 참여와 나눔의 시너지 효과들이 한국 브랜드들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아까의 질문에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것에 대한 관심도, 다양성도 없는 상태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문화적인 인프라가 활성되고 스트릿풋 같은 미디어, 공장, 브랜드들이 바탕이 되어 기복 타지 않는 꾸준한 마니아층이 형성이 되는 그런 미래. (스트릿풋 같은 거 보면서 이해도가 정말 높아질 거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기존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한국 브랜드건 외국 브랜드건 다양성이 추가가 되겠죠!

“슈즈 디자이너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자기만이 가진 특징과 생각을 표현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독특한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게 과제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덕트에 대한 열정이 중요하다.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영어공부 요령”
영어공부는 AFKN도 많이 봤고, 비디오가게 가서 영화를 빌려 까만색 전선 테이프로 자막 부분을 가리고 4번 정도를 봤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계속 봤는데 언어에서 중요한 게싱, 추측 능력이 많이 발달하는 것 같다. 저건 어떤 내용인 것 같다 짐작하다가 다섯 번째 볼 때 테이프를 떼고 보면! 그러면 절대 안 까먹는다. 카투사 친척형이 부대로 놀러 오라고 한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말을 계속 한 게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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