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비욘드스페셜 – 데이비드 오길비, 나는 판다. 고로 존재한다

데이비드 오길비, 나는 판다. 고로 존재한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광고계의 전설이다. 오길비는 폭넓은 아이디어, 풍부한 경험, 냉철한 경구, 넘쳐나는 자신감을 활용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광고를 만들어냈다. 한 번 세일즈맨은 영원한 세일즈맨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영원한 광고인이다.

 

500달러짜리 고객이었다. 그는 시골집을 개조해서 만든 이름없는 호텔로 손님을 끌어모을 방도를 찾고 있었다. 홍보비로 쓸 수 있는 돈은 고작 500달러였다. 고객은 광고대행사의 사장을 만나고 싶어했다. 사장은 푼돈 고객한텐 관심이 없었다. 사장은 고객을 사환한테 보냈다. 사환은 적은 예산으로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을 궁리했다. 사환은 호텔을 소개하는 우편엽서를 만들었다. 호텔을 찾을 만한 부유한 소비자들한테 보냈다. 6주 뒤였다. 호텔은 개장 첫날부터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성공을 맛보았습니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고백했다. 광고대행사의 말단 사원으로 출발한 오길비는 수십 년 뒤 광고계의 전설이 됐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이 신형 롤스로이스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음은 시계 초침소리 뿐이다.” 그가 쓴 롤스로이스 광고 카피다. “비누는 당신의 피부를 건조하게 하지만, 도브는 당신의 피부를 건조하게 하지 않습니다.” 도브는 오길비가 1955년에 쓴 이 카피를 아직도 활용한다. 오길비 역시 도브 카피를 자신의 슈퍼 카피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오길비가 전설이 된 건 그가 남긴 전설적인 카피 때문만은 아니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현대 광고의 철학을 정립했다. 1983년 오길비는 <광고 불변의 법칙>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람들이 내 광고를 창의적이라고 평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광고를 만드는 목적은 사람들이 내 광고를 보고 흥미를 느껴 그 제품을 사게 하는 것이다.” 오길비는 광고의 목적은 오직 판매라고 선언했다. 어떻게 하면 판매와 직결되는 광고를 만들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오길비의 전투적인 접근 방식은 광고주들한테 혁신적일 수밖에 없었다. 헨리 포드는 ‘제조의 목적은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절감’이라고 정의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국가의 목적은 시장의 실패를 수정하는데 있다.’ 고 정의했다. 현대 사회는 그들이 내놓은 정의 위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다. 마찬가지다. 현대 광고 역시 오길비에서 출발한다. 말년에 오길비도 말했다. “나도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들었는지 한 프랑스 잡지는 나를 아담 스미스, 에디슨, 마르크스, 록펠러, 포드, 그리고 케인즈와 함께 산업 혁명에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꼽고,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라 일컫더군요.”  오길비가 전설이 된 진짜 이유다.

 

데이비드 오길비는 1911년 6월 23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도 끝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오길비는 파리로 건너가 마제스틱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1932년 영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주부들을 상대로 아기 요리용 스토브를 팔았다. 방문 판매 경험은 오길비의 광고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물건을 파는게 목적이고 물건을 팔려면 미사여구보단 간결한 사실이 더 효과적이었다. “내가 한 거라곤 그들에게 사실을 제시한 것뿐이었습니다. 제품 하나를 파는 데 40분이 걸렸습니다. 대략 3000단어가 동원되었습니다.

 

오길비는 런던의 광고대행사에 들어가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미국을 향하고 있었다. 그 때 이미 미국은 생산의 제국이었다. 시장엔 싼 물건이 넘쳐났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일감을 제공했다. 일을 하고 돈을 받은 노동자들은 소비자로 변신했다. 이제 양쪽을 이어주는 일만 남았다. 광고가 할 일이었다. 1938년 미국 이민길에 오른 오길비는 여론조사기업 갤럽에 취직했다. 갤럽에서의 경험은 오길비로선 큰 자산이 됐다. 불특정 다수인 소비자들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계량화하는 과학적인 조사 방법론을 체득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탓에 오길비는 광고 대신 영국 첩보활동을 하게 된다. 오길비는 갤럽에서 배운 대중 조사 방법론을 첩보 임무에 활용했다.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읽는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1948년 오길비는 단 두명의 직원과 함께 휴잇, 오길비, 밴슨 앤 매더를 창업했다. 나중에 오길비 앤 매더가 되는 회사다. 광고주 하나 없는 상태였다. 오길비는 그 뒤로 7년간 수많은 경쟁 프리젠테이션에서 이겼다. 맥스웰 하우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시어즈, 레버 브라더스가 광고주가 됐다. 쉘은 가장 큰 광고주였다. 갤럽에서 배웠던 소비자 조사 방법론이 큰 보탬이 됐다. 오길비는 말했다. “카피라이터가 되기 전 내 직업은 리서치 연구원이었습니다. 나는 영국 광고 역사상 처음으로 카피 테스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초창기 시절에 나는 리서치 디렉터이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어요. 금요일 오후마다 리서치 디렉터로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한테 소비자를 분석한 보고서를 썼죠.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내가 쓴 보고서를 읽고 조치를 취하곤 했어요.

 

오길비는 1975년 은퇴했다. 프랑스의 고성 샤토 드 투푸에서 머문다. 이제 겨우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오길비가 광고계의 거장으로 꼽았던 스탠리 레소 같은 인물은 여든 살이 넘을 때까지 광고 대행사 J.윌터 톰슨의 사장으로 일했다. 오길비는 그를 두고 “너무 오래 현직에 있었던 계 한 가지 실수”라고 지적했다. 오길비는 떠날 떄를 알았다. 하지만 은퇴한 뒤에도 오길비 앤 매더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꾸준히 참여했다. 이미 오길비는 오길비 앤 매더 그 자체였다. 회사와의 서신 왕래가 너무 빈번해 인근 우체국 우체부의 월급을 올려줘야 했을 정도였다.

 

1999년 7월 21일 데이비드 오길비는 샤토 드 투푸에서 눈을 감았다. 75세 생일에 맞춰 했던 인터뷰에서 오길비는 “평생 원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기사 작위와 아이가 열명인 대가족”이라고 답했다. 오길비는 세 번 결혼을 했지만 자식은 하나뿐이었다. 대신 수많은 광고인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됐다.

오길비는 평생 자신의 경험을 믿었던 인물이었다. 자신이 평생 겪고 느끼고 배웠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광고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세웠다. 런던의 광고대행사 사환 시절 500 달러 짜리광고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선택했던 엽서 홍보 방식은 오늘날 다이렉트 메일이라ㄴ고 불리는 기법이다. 심금을 울리는 광고 카피와 눈이 휘둥그레지는 TV영상물은 화려하다. 다이렉트 메일은 수고롭고 애처롭다. 하지만 오길비는 말했다. “나는 다이렉트 메일의 필요성을 광야에서 외로이 외쳐왔다. 다이렉트 메일은 신규 광고주를 끊임없이 영입할 때 회사의 비밀병기가 되었고, 그들의 매출을 올려줘서 우리 회사가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외쳤다. “우리는 판다.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길비는 팔았다. 그는 현대 광고의 모든 것이 됐다.

 

<광고로 세상을 팔다, 오길비의 명카피>

세상은 급변한다. 하지만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면서 새로움을 갈구하는 오길비의 역동성만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광고도 판매되어야 한다” “소비자는 멍청하지 않다. 소비자를 당신의 부인처럼 생각하라” 그는 광고에 철학을 담았다. 현대 광고의 정수, 오길비의 명광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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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ㅣ http://beyond.koreanair.com/
원문 저자 ㅣ 신기주 <포춘 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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