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MBA] 소비자의 마음, 95%는 숨겨져 있다

“설문조사 좀 그만하고 소비자 관찰부터 시작하라.”

한국의 경영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부탁하자 전직 애플 부사장이며 세계 최고의 디자인컨설팅사 아이디오(IDEO)의 이사인 도널드 노먼 박사는 이렇게 일갈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매일경제 MBA팀과 인터뷰하던 중 했던 얘기다.

산업디자인 분야의 구루인 그의 말은 `정량적인 통계와 조사`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기업이 제품을 기획해 출시하고 이를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똑 떨어지는 수치와 척도`에 집착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강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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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정성마케팅 시대

#1. 팬티스타킹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1940년대였다. 소재도 별로 좋지 않았고 꽉 끼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소비자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듀폰사는 언제나 `불편하다`고만 답하는 소비자 설문에 의심을 품었다.

1980년대 정성적 접근과 조사방법을 채택하면서 팬티스타킹의 가능성이 살짝 엿보였다. 팬티스타킹에서 연상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묻자 소비자들은 늘씬한 다리를 상징하는 `키가 큰 말뚝`과 비싼 자동차, 실크 드레스 등 그림을 선택했다.

소비자들은 사실 팬티스타킹은 `섹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는 곧바로 마케팅 전략 수정으로 이어졌다. 편한 옷이 아니라 입으면 섹시한 옷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 듀폰사는 팬티스타킹으로 대박을 쳤다.

#2. 한국 가전시장이 늘 그렇듯이 2000년대 중반 세탁기 시장도 어느 때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전통 강자인 LG전자를 골치 아프게 한 현상이 나타났다. 특별하게 제기되는 고객 불만도 없는데 고객만족도가 낮아지고 매출액이 떨어졌던 것. 아무리 설문조사를 해도 소비자들 답변은 한결같았다.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는 얘기였다.

LG전자는 설문조사에서 파악되지 않는 문제점을 알아내기 위해 정성적 조사 방법인 `관찰기법`을 활용했다. 각 가정에 직접 카메라를 달아 세탁 과정을 관찰해 보니 주부들은 모두 까치발을 한 채 힘들게 세탁물을 꺼내고 있었다. 불편함이 습관화돼 있어 설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는 분명한 `불편`이었다. LG전자는 곧바로 세탁기 높이를 낮췄고 마케팅 전략에 이를 활용했다. 고객 만족도와 매출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신제품 출시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시장조사와 각종 설문을 통해 자료를 뽑는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 소비자 선호와 욕구를 척도로 정리하면, 최고경영자(CEO)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확신을 갖고 제품 출시를 명한다. 마케팅 담당자는 의욕적으로 전략을 짜고 판촉에 들어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한다. 신제품 80%가 이런 방식으로 시장에 모습을 보였다가 퇴출당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각종 조사에서 나타나는 소비자 욕구는 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짜인 95%는 나타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데, 표면에 드러난 5%를 전부(전체 소비자 성향)라고 믿고 나갔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소비자 욕구를 파악하는 기본은 누가 뭐래도 설문조사를 통한 정량적 접근이다. 문제는 이 방법만 믿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고 출시하면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

정성 마케팅의 구루이자 잘트먼 기법(ZMET) 창시자인 제럴드 잘트먼 하버드대 교수는 매일경제신문 MBA팀과 단독 인터뷰하면서 “시장조사에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도 신제품 중 80%는 결국 실패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척도화된 설문조사 같은 정량적 방법이나 포커스그룹 인터뷰 같은 낡은 정성적 조사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소비자 욕구는 5%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 스스로도 모르는 무의식의 95%에 접근해야 시장에서 성공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과학적으로 설계된 설문조사 문항과 척도에 따라 `제품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는 답변이 나오면 제품기획자, 마케팅 담당자, CEO 모두가 흡족해한다. 이정훈 베인&컴퍼니 파트너는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만약 5점 척도를 사용했을 때 `반드시 구매한다`는 5번 보기를 선택한 고객도 실제 구매하는 비율은 80%도 되지 않고 `살 생각이 있다`고 답한 고객이 실제 물건을 사는 비율은 20%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소비자 설문조사는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와도 최대한 결과를 낮추고 감점을 해서 판단해야 하는데 CEO나 임원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

이정훈 파트너는 “내가 기획해 출시한 제품을 아끼는 마음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통계를 해석한다”며 “CEO도 똑 떨어지는 수치로 `성패 여부`를 보여주니 결정이 쉬워지고 이에 만족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가장 과학적인 방법처럼 보이는 정량적 접근과 통계가 사실은 과학이라기보다 `믿음`에 의해 판단되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는 잘트먼 교수가 “기존 방법으로는 기업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낼 뿐 소비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알아낼 수 없다”고 설명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기업 내 임직원들의 심리적인 요인 외에도 설문조사 등 정량적ㆍ전통적 시장조사 방법이 갖는 한계가 커지는 이유는 또 있다.

허지성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조사 대상인 시장, 즉 고객집단 특성이 크게 변화하면서 시장조사ㆍ정량조사 방법의 어려움을 증대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선 유사한 특성을 지닌 대규모 소비자 집단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시장의 파편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데다 제품은 오히려 동질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장 주도권은 기업에서 고객으로 넘어갔고, 기업이 시장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고객이 상품조사를 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매일경제신문 MBA팀은 기존 정량조사 방법에 기반한 마케팅의 한계를 보완하는 전략을 제시하기 위해 아직은 국내 CEO들이 다소 생소해하는 `정성적 방법에 기반한 마케팅` 전략을 취재했다.

잘트먼 하버드대 교수, 수전 포니어 보스턴대 교수, 데이비드 글렌 믹 버지니아대 교수를 인터뷰했고, 김재일 서울대 교수, 유창조ㆍ여준상 동국대 교수 등 국내 학계 전문가와 컨설팅업체 실무 전문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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