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자주 간다, 솔직히 디자인이 눈에 안 띈다

[세계적 스타 디자이너이자 한국 사랑하는 지오반노니, 그가 우리 기업 향해 쓴소리]
뭘 빨리 만들라고만 한다고… 이탈리아선 타임스케줄 없다
디자인적으로 본 세계기업, 애플과 애플 아닌 곳만 있다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가 열리던 지난달 20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조나 토르토나 지역. 수력 터빈 제조 공장을 개조한 5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에 들어서자 벽과 바닥이 온통 흰색인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본 조르노(Buon giorno)!” 하얀 공간과 선명히 대비되는 짙은 눈썹의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 남자가 인사를 건넨다. 이 공간을 자택 겸 사무실로 쓰며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누비는 남자. 이탈리아 출신의 스타 디자이너 스테파노 지오반노니(Giovannoni·58)였다.

건축가 출신인 지오반노니는 이탈리아산업디자인협회가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주는 ‘황금콤파스상’을 받았고, 뉴욕 MoMA(뉴욕현대미술관)·파리 퐁피두 센터가 작품을 영구보존한 세계 디자인계의 손꼽히는 스타. 대표작인 마지스사(社)의 ‘봄보 의자’는 21세기에 가장 많이 불법복제된 의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엔 궈진룽 베이징 시장이 자문하러 그의 밀라노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삼성전자·아모레퍼시픽·SPC·한샘 등 다수의 한국 대기업과 일해온 지한파이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도 부산의 한 업체가 그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러 와 있었다.

―디자인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과거엔 물리적인 형태나 소재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기술 자체가 중요한 소재가 됐다. 더 예뻐졌느냐가 아니라 더 ‘진보’되었는가가 관건이다. 기술을 기반으로 해 철학·문화처럼 무형적인 가치가 더해져야 한다. 이 점에서 애플이 독보적이다.”

애플의 강점은 무엇인가.

“애플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미국적이라기보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통적 프로세스를 따랐다는 평을 듣는다. 이탈리아에선 제품 하나를 개발할 때 타임 스케줄이 없다. 그저 ‘좋은 가구를 만들어보자’라는 식으로 시작한다.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래 걸리더라도 최상(最上)을 만들어내자’는 정신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 명작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애플이 그렇다. 한국에선 이런 정신이 부족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난 디자이너 스테파노 지오반노니. 뒤로 보이는 하얀 공간이 사무실이다. 이탈리아 초기 산업 시설의 흔적이 깃든 5층짜리 수력 터빈 제조 공장을 개조해 사무실 겸 자택으로 쓰고 있다. 밀라노=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애플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는 건 아닌가.

“디자인의 관점에서 지금 전 세계 기업은 냉정하게 ‘애플’과 ‘애플이 아닌 회사’, 두 유형의 회사가 존재할 뿐이다. 제품만 혁신적으로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회사의 철학, 문화까지도 동시에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거다.”

한국 기업과 일하면서 느낀 인상을 말해 달라.

“한국 회사는 하나같이 ‘이런 스타일의 ○○을 언제까지 빨리빨리 만들어 달라’고 한다. 디자이너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이들이 만약 ‘우리 회사는 당신과 함께 진정 훌륭한 디자인의 ○○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면 훨씬 행복한 마음으로 일에 임할 것이다. 소재·마감 등에 대한 리서치는 최고다. 그러나 개념 자체에 대한 진지한 리서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 재료를 조합해서 제품을 만드는 데 그친다. 혁신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마케팅·시장 분석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한국 기업들이 당신 같은 스타 디자이너들의 ‘이름값’을 마케팅에 활용한다는 지적이 있다.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다. 스타 디자이너와 함께 일한다는 건 세계적 안목을 가진 디자이너를 통해 기업의 시야를 넓힐 기회다. 문제는 촉박한 시간에 일회성으로 개별 제품 하나 만들고 끝난다는 것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기업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드는 데 스타 디자이너를 써야 한다.”

(왼쪽부터)21세기 가장 많이 불법복제된 의자로 선정된 마지스의’봄보의자’, 사람 모양 아이콘으로 커팅해 무게를 가볍게 하면서 특징적인 디자인을 살린 알레시의‘지로톤도’쟁반, ‘플라스틱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입증해 주는 알레시의 오렌지즙 짜개 ‘만다린’. /스테파노 지오반노니 제공

―스타 디자이너들에게 ‘한국 시장이 봉(鳳)’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본에서 많이 받는다.”

―한국 사회가 디자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보는가.

“아직 디자인이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듯하다. 두통약을 만든다고 해보자. 통증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부터 연구하는 게 수순이다. 하지만 한국은 두통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배부터 보는 것 같다. 대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구에서부터 디자인이 시작돼야 한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디자인 측면에서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아쉽게도 사물로는 없었다. 한국 사람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지적 수준이 높고 열정적이다. 이런 좋은 인적 자원이 있기에 한국 디자인도 곧 발전하리라 본다.”

[포크 하나에 4년… 디자인은 기다림] 주방용품업체 알레시의 例

스테파노 지오반노니는 한국 기업의 ‘타임 스케줄에 대한 강박’을 지적하며 교훈이 될 만한 일화를 공개했다. 그가 10여년 전 이탈리아 유명 주방용품업체 ‘알레시(Alessi)’를 위해 만든 스테인리스 숟가락·포크 세트 ‘마미’ <사진>에 얽힌 이야기였다.

그는 당시 가벼우면서 쥐는 느낌이 편하도록 숟가락과 포크의 손잡이 안을 비운 디자인을 알레시에 제안했다. 그런데 제작 단가를 맞추면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낼 업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의 회사라면 기한 내에 만들 수 없고 단가도 안 맞으면 바로 디자인을 변경해 버렸겠지만 알레시는 ‘시간’에 연연하지 않았다. 결국 전 세계 하도급업체를 찾아다니다 2년 만에 한국에서 기술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업체를 찾아냈다고 한다. 만 4년 만에 출시된 이 제품은 지금까지 알레시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오반노니는 “회사가 ‘디자인 명품’을 만들어 보자는 철학이 있었기에 타임 스케줄에 쫓기지 않았던 것”이라며 “디자인은 기다림”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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