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혁신은 디테일에서 시작

[Cover Story] 이사도어 샤프
‘럭셔리 호텔의 대명사’포시즌스 호텔 앤드 리조트 회장

이사도어 샤프

1955년 9월 행복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캐나다의 샤프 부부는 첫날밤을 완전히 망쳤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제일 인기가 좋다는 호텔로 예약했는데, 객실은 작고, 가구는 낡았으며, 소음도 심했다. 심지어 화장실도 공용이었다. 남편 이사도어는 아내 로잘리가 “화장실에 누군가 있어요” 하고 외쳐대는 통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이 호텔은 늘 만실(滿室)이었고, 로비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공항 옆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작은 건설 회사를 운영하던 샤프는 ‘이 정도 수준의 호텔이 돈을 잘 버니, 이곳을 능가하는 곳을 만들면 더 돈을 벌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960년 샤프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토론토 중심가 자비스가(街)에 100실 규모 모텔을 지었다. 이름은 독일 뮌헨 여행 중 마음에 들었던 최고급 호텔 ‘피어 야레스차이텐(Vier Jahreszeiten)’에서 따왔다. 영어로 ‘포시즌스(Four Seasons·사계절)’. 전 세계 41개국에 96개 호텔을 가진 ‘포시즌스 호텔 앤드 리조트’ 그룹의 시작이다. 연간 매출 40억달러, 전 세계 직원 수는 4만4000명에 이른다(2013회계연도 기준).

흔히 럭셔리 브랜드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사도어 샤프(Sharp·85) 포시즌스 호텔 앤드 리조트 회장 겸 창업자는 “고객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해 준다면 단기간에도 강력한 브랜드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샤프 회장은 호텔 경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경영학 석사(MBA)를 마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호텔 업계의 전설’로 불린다. 모든 비즈니스의 종합판이라는 호텔업에서 어떻게 그는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었을까.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팜스프링스 별장에서 그를 만났다. 오전 9시 벨을 누르자 샤프 회장은 아내 로잘리가 잠깐 밖으로 나갔다며 직접 문을 열어줬다. 그러고는 쟁반에 미리 준비해 둔 초코칩 쿠키와 커피를 갖다 줬다. 친절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1970년 돌체스터, 리츠, 사보이 등으로 이미 포화 상태였던 영국 런던 5성급 호텔 시장에 처음 진출했습니다. 무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가족과 친척, 투자자 등 모든 사람이 반대했습니다. 당시엔 제2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많은 고급 호텔 실적도 악화될 때라 업계에선 ‘더 이상 고급 호텔은 필요 없다’는 보고서도 쏟아졌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호텔이 즐비한데, 처음 듣는 브랜드의 고급 호텔이 들어서면 무조건 망한다고 본 것이지요. ‘어리석은 캐나다인’이란 놀림도 들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제게 차라리 객실 수를 100개 정도 늘려 비즈니스호텔을 만들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자신 있었습니다. 경제가 회복되면 호텔업은 살아날 것이고, 최고급 호텔에서 묵기를 원하는 부유한 사업가도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주(主) 고객층으로 생각한 건 런던을 방문한 북미 부유층과 사업가였습니다. 전 런던의 그 어떤 호텔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은 맞았습니다. 문을 연 첫해 런던 포시즌스는 유럽 내 ‘올해의 호텔’로 선정됐습니다.”

―런던에 호텔을 지으며 북미 부유층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고객들의 어떤 수요를 읽은 겁니까.

“당시 런던 고급 호텔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제가 호텔을 지을 때도 건축 회사에서는 ‘1년에 한두 차례밖에 안 쓸 테니 에어컨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더울 때 에어컨이 없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비용이 애초 예상을 크게 넘어섰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최고급 침대와 베개를 찾아 헤맸습니다. 유럽 내 손님들과 달리 북미 고객들은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피곤한 상태입니다. 저희는 그들의 그런 불편함을 덜어주기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서비스도 도입했습니다. 유럽 내에선 밤 10시 이후 영업하는 식당이 드뭅니다. 그래서 저희는 24시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룸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출장 온 다음 날 아침 미팅을 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24시간 구두 닦기와 다림질 서비스도 처음 도입했습니다.”

 ―호텔 경영은 처음인데, 어떻게 손님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나요.

“전 호텔리어가 아닌 건축가 출신입니다. 손님 처지에서 생각하기엔 더 유리합니다. 모든 호텔이 ‘좋은 서비스’를 중시하지만, 그 서비스는 손님보다는 호텔 관점에서 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호텔업을 시작한 후 ‘최초’자가 붙은 서비스만 25가지를 도입했습니다. 제겐 여자 형제가 세 명 있는데, 작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 걸 불편해했습니다. 그래서 북미 호텔 중 처음으로 큰 수건을 설치했습니다. 호텔 내 샴푸가 쓰기 싫어서 항상 병에 샴푸를 넣어 다니는 것을 보고 호텔 샴푸를 고급 제품으로 배치했습니다. 방에서 담배 냄새 나는 걸 싫어하는 친구를 보고 금연층을 따로 뒀고, 매일 운동하는 제 성격에 맞춰 호텔에 피트니스 센터를 마련했습니다. 어찌 보면 상식 수준입니다. 당신도 이 정도 생각은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레드오션(Red Ocean·경쟁자가 많은 시장)’은 없습니다. 어느 시장에나 혁신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혁신은 그렇게 크지 않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포시즌스 바레인 베이
포시즌스 바레인 베이

―당신이 처음 도입한 서비스들은 이미 다른 호텔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포시즌스만의 차별화된 전략은 무엇입니까.

“서비스업의 승패는 작은 데서 결정됩니다. 저희가 처음 구두닦기 서비스를 도입했을 때 화장실 변기 물탱크 위에 구두 바구니를 놓으니 아무도 안 썼습니다. 그래서 침대 발치로 옮겨 놓았는데, 사용률이 50% 이상 증가했습니다. 전화기를 침대 옆뿐 아니라 화장실에도 두는 것, 화장대 거울에 불이 들어오는 것, 밤에도 볼 수 있는 디지털 시계를 설치하는 것 등이 모두 디테일입니다. 저희는 ‘고객 기록 시스템’도 도입하고 있습니다. 손님마다 선호하는 음료, 꽃, 취향 등을 적어놓고 재방문 때 똑같이 해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새벽 2시에 고객이 직원에게 ‘LA로 가는 비행기표가 필요해요’ 하면 5분 안에 표를 구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불만 사항이 접수될 경우 즉시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체크아웃할 때 담당자가 직접 나와 사과합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캐나다 단골 정치인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저희는 따로 불편한 게 있는지 연락을 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저희 경쟁사 베개가 마음에 든 겁니다. 저희는 바로 베개를 싹 바꾸고 그분에게 재방문 요청을 했습니다. 줄리아 로버츠가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하며 ‘가장 좋아하는 침대가 포시즌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봤나요? 당시 윈프리도 ‘내 침대보다 유일하게 좋은 침대는 포시즌스 침대’라고 말했지요. 저희는 이런 서비스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브랜드 가치가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건축가에서 호텔 경영자로 직업을 바꾸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돈과 시간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업 초기 제게 호텔 사업은 ‘야간 업무’였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것을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믿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자신을 믿고 시도하세요.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있고, 당신에게 그 기회가 다가갈 것입니다.”

1979년 미 대선 주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포시즌스 워싱턴 DC’에서 선거 자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크라이슬러, 포드, IBM 등 내로라하는 미 기업들의 대표가 후원자로 참석하는 자리였다.

브랜드 인지도가 전혀 없던 포시즌스가 이런 큰 기회를 잡은 것은 ‘2800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라는 주소 덕분이었다. ‘1600 펜실베이니아 애비뉴’가 바로 미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 주소였기에 가깝기도 했고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후원자는 모두 포시즌스의 단골손님이자 홍보 담당자가 됐다. 호텔 위치가 영향력이 큰 고객을 여럿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포시즌스 호텔은 럭셔리 호텔 후발 주자지만 각 도시 중심에 있다. 뉴욕은 센트럴파크 바로 옆인 이스트 맨해튼에, 파리는 샹젤리제 거리 옆 센 강변에 있다. 샤프 회장은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하드웨어는 부지, 소프트웨어는 사람”이라며 “유럽에선 좋은 위치를 찾을 때까지 20년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호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첫째는 당연히 서비스죠. 하지만 둘째부터는 호텔 성격에 따라 나뉩니다. 저희는 도시별로 그 성격에 맞는 호텔을 짓습니다. 크게는 도심 호텔과 리조트형 호텔로 나뉩니다. 도심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 리조트형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설입니다. 고급 호텔 시작은 런던에서 했지만 다시 유럽에 진출하기까지는 20년이 걸렸습니다. 이미 좋은 장소는 유명한 호텔이 선점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프랑스 파리 등에선 좋은 터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터가 나오면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체코의 프라하입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후 프라하 블타바 강변 카를교(橋) 주변에 호텔 부지가 매물로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건물이 3채 있었는데 한 채는 체키스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고, 두 채는 정부 소유였습니다. 이 땅을 두고 저희와 리츠칼튼이 맞붙었습니다. 체키스 건물이 가장 크고 협상이 까다로웠습니다. 저희는 체키스부터 공략했고, 리츠칼튼은 정부부터 상대했습니다. 결국 그 땅은 저희가 사게 됐습니다.

반면 도쿄는 도시이지만 리조트형 호텔로 접근했습니다. 조사해보니 북미 호텔은 식음료 판매 수익이 30%인데, 도쿄는 70%였습니다. 도쿄는 결혼식이나 연회 등을 호텔에서 하는 일이 많아 식음료 수익 비중이 높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희는 일본 왕자의 저택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2만㎡가 넘는 도쿄 외곽에 호텔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 전략은 성공했고, 1년 만에 ‘닛케이리포트’가 선정한 도쿄 내 호텔 1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본 후지타관광과 제휴해 운영했던 도쿄 외곽의 리조트형 호텔 ‘포시즌스 진잔소(椿山莊)’는 2013년부터 후지타관광이 단독 운영 중이며 포시즌스 명칭을 쓰지 않고 있다. 포시즌스는 현재 도쿄에선 도심에 호텔을 운영 중이다.

이사도어 샤프

―최근 문을 연 포시즌스 서울은 어떤 개념인가요.

“서울은 비즈니스 고객이 많기 때문에 도심 호텔을 콘셉트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위치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제가 서울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광화문에 호텔 부지가 생기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고, 결국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위치에 호텔을 짓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문화적 다양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점을 감안해 포시즌스 서울 로비는 나무로 휴식 공간을 만들고, 화로를 모티브로 로비 중심을 디자인해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옛 성을 개조해 벽화를 그대로 보존하는 쪽으로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이스탄불은 감옥을 개조해 특이한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힐튼이나 하얏트 등은 비즈니스부터 럭셔리급까지 다양한 브랜드를 운영합니다만 포시즌스는 하위 브랜드가 없는 단일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리조트형과 도심형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는 얘기인데, 브랜드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경쟁사들이 여러 등급 호텔을 운영한다는 건 저희가 최초로 최고급 호텔에만 집중하는 회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의 첫 토론토 모텔 등 기준에 맞지 않는 건 다 매각했습니다. 제 원칙은 ‘포시즌스는 아무나 오는 호텔은 되지 않게 만들겠다’였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항상 직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한번은 간부들이 ‘가죽 대신 재질이 비슷한 비닐을 쓰자’고 했습니다. ‘실크 대신 폴리에스테르를 사용하자’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그 차이를 모를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은 그 차이를 모르겠지만, 저희 고객들은 단번에 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럭셔리 호텔 사업은 불황 체감 정도가 높기로 유명합니다.

“1980년대 후반 발생한 경기 침체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호텔은 도어맨을 없애는 등 직원을 줄이고, 카펫 교체도 줄이는 등 위기 경영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전 불황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경쟁사들이 기준을 낮출 때 우리는 높이자’고 했습니다. 직원 해고도 하지 않았고, 대신 객실료도 낮추지 않았습니다. 적자는 은행에서 대출받아 버텼습니다. 결국 당시 불황은 포시즌스가 또 한 번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기회가 됐습니다. 저는 ‘문제’란 ‘기회’의 또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숙박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의 성공으로 호텔 업계 위기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에어비앤비는 좋은 사업입니다. 하지만 5성급 호텔의 타깃인 VIP 고객이 원할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완벽한 서비스와 시간입니다. 그것을 에어비앤비가 충족해줄 수 있을까요.”

―포시즌스는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 16년 연속 선정됐습니다.

“저는 직원들의 불만 사항을 고객들의 불만 사항과 똑같이 신경 써서 처리합니다. 호텔을 개조할 때면, 직원 시설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말단 직원들에게 ‘권한 부여(empowerment)’도 하고 있습니다. 관리자의 감독 없이 직원들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실 호텔 이미지를 결정하는 건 회사 내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도어맨의 환한 미소가 호텔 이미지를 높이기도 하고, 웨이터의 무례가 이미지를 망치기도 합니다. 저희의 서비스 공식 선언문은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하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이에게 행하라’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저희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닌,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인품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직원을 뽑으려고 합니다. 능력은 교육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지만, 사람의 태도는 교육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호텔리어의 가장 큰 자질은 소질(aptitude)이 아닌 태도(attitude)입니다.”

―비교적 단기간에 거대한 호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족입니다. 제 아버지는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출신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학살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다가 캐나다로 이민 오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도 캐나다 빈민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어를 잘 못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배관공, 목수, 미장일 등을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사업 규모가 커진 후에는 계약을 잘못해 빚에 허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공사의 질을 낮추지 않고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사업을 하는 동안 닮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아내 로잘리는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제가 두 번째 호텔을 짓기로 한 토론토 부지는 황량했습니다. 길 건너편에는 쓰레기 처리장까지 있었습니다. 모두들 반대하자 저는 로잘리를 데리고 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제게 ‘좋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털어놓은 속마음은 ‘만약 (사업에 실패해) 집을 잃게 되면 난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겠군’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제 셋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입니다. 전 그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많은 경우 아이를 잃으면 그 가정은 파탄이 납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는 그 고비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저희에게는 아직 세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업에서 한 실수는 만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깨지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늘 제게는 가족이 최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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