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쇼핑하면서도 스토리를 원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작업실에서 만난 알렉산드로 멘디니. 자신이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 “자연·기하학은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도 아이디어 소재”라고 설명했다.

단발머리 소녀가 웃고 있는 모양의 와인 오프너 ‘안나G’. 이탈리아 생활용품 업체인 알레시에서 1994년 내놨다.

소녀의 양팔을 올렸다 내리면 코르크가 올라온다. 판촉용으로 5000개만 나왔다가 인기가 좋아 정식 발매했다. 결국 총 1000만 개 이상 팔렸고 후추통·도시락통까지 시리즈로 변신했다. 이 제품을 디자인한 이탈리아인 산업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멘디니(81)는 “어릴 적에 어른들이 와인 따는 모습을 보며 빙글빙글 도는 발레리나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알레시로부터 와인 오프너의 디자인 제의를 받았을 때 그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 제품으로 멘디니는 독일식 기능주의와 차별화되는 산업디자인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알레시뿐 아니라 에르메스·까르띠에·스와치·필립스 등과 함께 300개가 넘는 제품을 선보였다.

 지난달 말 이탈리아 밀라노의 ‘아틀리에 멘디니’를 찾았다. 그의 작업 공간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종이 수십 장만이 작은 박스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까르띠에 프레젠테이션도 종이에 연필로 그려서 한다”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를 배운 적은 있는데 내 실력이 형편없어 40년 넘게 연필과 종이만으로 작업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아날로그 디자이너’ 멘디니가 컴퓨터를 위해 디자인한 첫 작품이 나온다.

 
새로 문을 열 롯데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웹 디자인.

30일 문을 여는 롯데백화점의 온라인 쇼핑몰 ‘엘롯데(elLOTTE)’다. 멘디니가 웹페이지의 전체 컨셉트와 메뉴·아이콘에서 제품을 배달할 때 쓰는 포장 박스까지 디자인했다. 그는 “여든 넘어 처음 하는 일이 생겼다는 게 나도 신비하다”고 말했다.

 멘디니의 실생활은 온라인·쇼핑 모두와 거리가 멀다. 기자와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짙은 회색 재킷, 빨간 스웨터를 가리키며 “이것도 수십 년 전 동네 옷가게에서 샀다”고 했을 정도다. 지난해 3월 롯데백화점의 제의를 받은 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회의에서 “차가운 인터넷몰이 아닌 ‘사람’이 느껴지는 온라인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조수들과 몇 개월 동안 기존 인터넷몰을 ‘공부’하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가 생각하는 온라인몰의 성공 조건은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와인 오프너 ‘안나G’의 성공 요인과 비슷하다. 그는 “사람들은 로맨틱한 이야기를 원한다”며 “쇼핑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미소 짓는 사람의 얼굴과 하트·클로버 모양을 아이콘 등으로 쓰고, 주로 따뜻한 색을 바탕으로 깔았다. 온라인으로 쇼핑할 때도 판매원을 만나 도움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남들이 컴퓨터를 보는 동안 나는 사람과 책을 많이 만났다”며 이번 온라인몰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자신감을 보였다.

 기존의 온라인몰이 기능에만 디자인의 초점을 맞춘 것도 지적했다. 그는 “웹디자인도 디자이너와 인터넷몰의 컨셉트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건을 많이 팔리게 하는 것만이 디자인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멘디니는 2010년부터 LG전자의 냉장고, 차병원의 로고, 롯데카드의 카드를 디자인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멘디니는 “세월이 가도 줄어들지 않는 호기심이 내 영감의 원천”이라며 “쇼핑도 하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지만,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않은 아이디어를 내놓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의사가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일하겠다”며 열정도 내비쳤다.

밀라노=김호정 기자

아틀리에 멘디니

알렉산드로 멘디니와 동생인 건축가 프란체스코(73)가 1989년 세운 디자인 회사. 밀라노의 2층 건물에서 직원 20명과 함께 건축물·가구부터 유리공예·도자기와 같은 예술품까지 디자인한다. 동생은 건축·전시 분야를 주로 담당한다.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가 함께 일하고 있으며 약 30개국 기업·정부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내놨다. 세계적 디자인 전람회인 트리엔날레 디 밀라노에서 2003년 건축 금메달을 수상했다. 국내 가구 업체에서 일하던 중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던 차영희(41)씨도 2000년부터 이곳에 합류해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Related Posts

Comments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

4 + 5 =

Stay Connected

spot_img

Recent St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