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머리라면 하버드 5개는 있어야”

세계최고 컨설팅회사 맥킨지의 도미니크 바튼 회장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한국이었다
파트너 승진 심사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결국 회장 자리에 올라
“한국과 중국에서의 12년 경험, 회장으로 선출되는데 결정적 역할
변화가 심할수록 빨리 성장한다
지금 다시 34세로 돌아간다면 아프리카行을 선택할 것”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선택 한 번이 인생 전체를 결정할 수도 있다. 도미니크 바튼(51) 맥킨지 회장에게 그것은 ‘한국’이었다.

1996년 맥킨지 캐나다의 촉망 받는 컨설턴트였던 그에게 한국 사무소에서 일해 보자는 선배의 제안이 왔다. 그의 멘토들은 극구 말렸다. “경력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힘든 곳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력이 정체기에 들어섰다고 느꼈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한국에 왔는데, 이 선택이 없었다면 결코 세계 최고 컨설팅 회사의 수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맥킨지 한국사무소 대표에 이어 중국 상하이의 맥킨지 아시아 회장에 이르기까지 12년을 아시아에서 일했다. 급성장하는 아시아를 몸으로 겪은 그의 남다른 경력은 2009년 맥킨지의 회장 선출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왜 한국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많은 변화가 있는 곳, 급격한 변화가 있는 곳일수록 빨리 성장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저에게 최고의 리더십 경험은 여기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리더는 변화 속에서 배우거든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도전을 받았고,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상하이의 삶은 마치 커튼이 열리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

그는 한국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야망’이라고 했다. “한국엔 다듬어지지 않은 야망(raw ambition)이 있어요. 야망의 수준이 높습니다. 런던 사무실에 제가 커다랗게 걸어 놓은 사진이 바로 포스코 건설 현장 사진입니다. 하얀 작업모를 쓴 사람들이 땅 구덩이를 파는 사진입니다. 당시 모두가 한국은 철강 회사를 만들 수 없다고 했죠. 세계은행은 나쁜 아이디어라고 했죠. 당시 맥킨지에 물어봤더라도 하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웃음). 그런데 그걸 했고, 결국 엄청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인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저는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가 한국에서 배운 다른 한 가지는 “모호함과 씨름하면서 강력하게 실행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정부 규제가 변하고, 기업의 경쟁 판도가 급변하는데 어떻게 경영을 할까 감탄할 때가 많았어요.”

그는 중국에서는 거대 조직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지사 2500개와 직원 80만명을 관리하는 것은 캐나다에서 직원 2만명의 회사를 관리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까요.”

그는 아시아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방법도 배웠다고 말했다. “아시아 기업들의 시간 관념은 뭘 하든지 장기적으로 일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3개월이나 3년 정도가 아닙니다. 20~30년을 내다봅니다. 변동성이 극심한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시아 근무를 마치고 서구로 돌아와 보니 서구의 자본주의는 너무 단기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멀리 내다보는 자본주의(Capitalism for the long term)’란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도미니크 바튼 맥킨지 회장이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 콘퍼런스가 열린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야외 테라스 시설을 걷고 있다. 그는“한국에서 근무한 6년 동안 한국 기업인들의 높은 야망과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말했다./성형주 기자

―한국에 2004년까지 살았는데, 그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게 뭡니까?

“기본적으로 한국에 훨씬 많은 글로벌 챔피언이 생겼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큰 회사가 엄청 많아졌죠. 둘째는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입니다. G20을 주최했잖아요. 그리고 서울은 훨씬 국제적인 도시가 됐어요. 제가 처음 1996년에 왔을 때 인도 음식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세계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한국에 여러 가지 도전도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압박이 너무 많아졌어요. 교육비 부담과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졌어요.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어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입니다. 높은 야망과 강한 에너지가 그렇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이런 행사(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를 주최하는 나라가 몇 곳 안 돼요. 한국은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건 변하지 않았어요.“

―전혀 바뀌지 않은 안 좋은 점은 무엇이 있나요?

“하나는 금융 시스템입니다. 한국은 중요한 금융센터가 될 수 있는 곳인데, 아직 그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금융 플레이어들이 더욱 광범위한 지역의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실망했습니다. 물론 위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은행이 파산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한국에서 10년 동안 바뀌지 않은 다른 한 가지는 교육 시스템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의 두뇌와 에너지를 보면 한국에 하버드대가 5개 정도는 있어야 해요. 모든 게 대학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은 학생들을 막무가내로 대학에 집어넣어 이 시대에 필요한 직업 능력을 개발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교육 시스템에 더 많은 역동성과 혁신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한국에 새로운 대기업이 탄생하고 있습니까? 제가 한국을 떠난 이후로 주목할 만한 기업이 새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미국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업 이름을 댈 수 있어요. 한국은 중소기업이 성장해 대기업이 되는 경로가 매우 약합니다.”

그가 34세로 다시 돌아가 근무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번엔 어떤 나라를 선택할까. 그는 “아프리카”라고 대답했다.

“나이지리아나 에티오피아를 고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매우 높은, 성장률 10~12%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죠. 변화가 많기에 리더십 관점에서 많이 배우고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아시아의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이런 곳도 좋습니다.”

―한국에 가장 최근에 온 것은?

“2월입니다. 여기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9월이나 10월쯤 다시 올 것입니다.”

―사무실이 어디인가요?

“여러 곳이죠. 하지만 내 옷을 보관하는 (진짜) 사무실은 런던입니다. 4년 전 런던으로 이사 갔는데, 거기가 내 허브(hub)입니다.”

―뉴욕이 아니라 런던을 택한 이유는?

“시간대 때문입니다. 만약 아시아 쪽에 말할 게 있으면 아침 4~5시에 일어나거나 밤늦게 사무실에 남아 있으면 전화할 수 있어요. 또 오후 2시면 미국은 어디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편리하죠. 비행 시간 문제도 있어요. 아시아의 어떤 곳을 가든 13시간 안에 갈 수 있어요. 뉴욕에서는 18시간이 걸려요. 저는 늘 여행하거든요. 여기 앱을 보여줄게요. 제 삶을 추적하는 앱입니다.”

그는 갤럭시S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그는 블랙베리도 갖고 다니지만, 아이폰은 없다고 했다.) 그동안 어디를 다녔는지를 알려주는 앱이었다. 그는 지난 7일간 8077㎞를 다녔고, 지난 209일 동안 24개국, 75개 도시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는 태생부터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캐나다인인 그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성공회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몸이 안 좋을 땐 꼬리곰탕을 먹는다

―즐겨 먹는 음식이 갈비라던데.

“네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좀 몸이 안 좋을 땐 꼬리곰탕을 먹습니다. 딸은 고추장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항상 서울에 올 때마다 작은 튜브에 담긴 볶은 고추장을 몇 상자씩 사 갑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조언을 많이 하셨죠. 박근혜 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 이 대통령에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에 열정을 가지느냐가 다른 것 같습니다. 이 대통령은 녹색 산업에 큰 관심을 가졌어요. 또 G20을 포함해 세계에서 뭔가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열정이었어요. 박근혜 대통령의 열정은 국민을 행복하고 균형 잡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이 말했듯이 ‘전임자가 했던 것 중에서 좋은 것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새 정부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 경제인데, 한국이 혁신의 메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가 도울 수 있는 것은 해외의 플레이어들을 끌어모으는 것이 첫째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자, 엔터테인먼트 종사자 등…. 여기를 허브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생태계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우선순위를 만들어 외국 사람들이 쉽게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싱가포르가 그런 걸 잘합니다.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이 정말 잘해요. 그들은 마치 혁신기업 프록터앤갬블(P&G) 같아요. ‘뭐가 필요한가? 뭐가 걱정되나?’ 그들은 늘 기업에 물어봅니다. 교육을 볼까요? 어떤 교육이 창조 경제를 만들까? 한국에 영화 학교가 몇 개인가? 줄리아드 같은 음악 학교가 몇 개인가? 우리가 어떻게 교육 시스템을 재설계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최고의 인재가 뉴욕이 아닌 한국에 오도록 해야죠.”

―그동안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한국 대기업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급성장했습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장 큰 도전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새롭게 구축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몇 년 동안 성공하게 만든 것이 지속적인 성공 공식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바꾸느냐, 그건 어려운 일일 겁니다. 특히 조직이 클수록 말이죠.”

◇파트너 승진 두 번 떨어지고 회장이 되다

전 세계 100대 기업 중 90개사가 컨설팅을 받는 회사, 매출 10억달러 이상 회사 중 315개사의 CEO가 몸담았던 회사, 세계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 2위에 꼽힌 회사….

이런 회사의 1인자라면 인생에서 무슨 실패를 했을까 싶다. 하지만 바튼 회장의 삶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쓰라린 실패는 맥킨지 초년병 시절 파트너 심사에서 두 번 연속 떨어진 일이다. (파트너가 되면 회사 지분을 가지면서 경영진의 일원이 되는데, 일반 회사로 치면 등기 이사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왜 떨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한 프로젝트 매니저가 ‘당신은 좋은 문제 해결자가 아닌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수학자에게 수학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두 번 탈락하고 나서는 너무 화가 나서 회사를 그만둘 뻔했죠.”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는 결국 세 번째 파트너 심사에 통과했고, 지금은 조직의 수장이 됐다.

그는 당시의 실패 경험을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 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맥킨지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세워야지’ 하고요. 내 운명을 남이 아니라 내가 정하겠다는 겁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의 문제에 대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질을 파고드는 스타일이었고, 자기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를테면 정유 회사 컨설팅을 나가면 주유소에서 직접 주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의 상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실패의 경험들이 자기를 성장시켰다고 말했다. “만약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실패하지 않으면 복원력(resilience)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게 됩니다. 많은 CEO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항상 무언가가 그들을 넘어뜨리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나곤 하죠.”

―과거 경험을 돌이켜볼 때 기업들이 늘 겪지만,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만성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요?

“한 가지를 꼽는다면 변화에 대한 저항감입니다. 1935년 S&P500주가지수에 포함된 500개 회사의 평균 수명이 9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18년입니다. 많은 회사가 사라졌습니다.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코닥과 팬암항공을 포함해서요. 아이러니한 것은 성공했을 때 변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감이 모든 회사의 공통된 고질병이고, 맥킨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끔 거울을 보면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 빨리 변화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조직의 밑바닥엔 늘 숨은 인재가 있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첫 다섯 고객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는 미국의 대형 소비재 기업 CEO였습니다. 당시 전 스물세 살이었는데, 그는 저를 놀리곤 했습니다. 제가 뭔가를 프레젠테이션하면 그는 면도날로 수염 깎는 시늉을 했습니다. 면도기를 이용해 본 적이나 있나, 어른이 된 게 맞나 하고 놀리는 것이었어요. 그가 하루는 자기 집에 초대했어요. 갔더니 ‘내 손자들과 놀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저는 컨설턴트가 돼야 하지 않나요?’ 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말하더군요. ‘나는 53세이지만, 18세의 두뇌를 갖고 있어. 내 얼굴엔 면도날에 벤 상처 자국이 많지만, 난 여전히 18세의 두뇌로 생각해’ 하고요.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한 정유 회사의 주유소에 편의점을 설치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그게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었어요. 사실 저는 맥킨지를 그만두고, 그 일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유망한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들도 그게 큰 기회라고는 생각했지만, 유가가 조금 오르기만 한다면 그 정도의 돈(주유소에 편의점을 설치해 버는 돈)은 푼돈 수준이었던 겁니다. 그 모든 변화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 정답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조직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야망이 무엇이고,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무엇인지. 한국의 어느 은행에서도 배웠습니다. 그 은행장이 내게 ‘우리 조직에서 3~4단계 아래에 있는 직원들을 만나서 인재를 찾아보라”고 부탁했는데, 그 일을 통해서 조직에 파묻혀 있는 정말 중요한 핵심 인재 4~5명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 은행장이 그들을 잡아서 임원으로 앉혀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으로 키웠죠. 그래서 전 조직에는 늘 인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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